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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이 1팀 아바타들의 명승부 … 월드컵 열기 못지않은 '롤드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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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004년 7월 17일 저녁 부산 광안리 해변에 10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 게임인 스타크래프트 ‘스카이 프로리그 2004’ 1라운드 결승전을 보기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10, 20대 사이에 불던 ‘스타크 광풍’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이날의 승부를 후세 게이머들은 ‘제1차 광안리 대첩’으로 불렀다.

[캐릭터 이미지=라이엇 게임스]▷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14년 6월 8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 화정체육관에는 유치원생부터 30, 40대 성인들까지 다양한 연령의 게임 팬 수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장안의 화제 ‘리그 오브 레전드(롤·LOL)’의 ‘롤 마스터스’ 결승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팬들은 응원하는 팀을 상징하는 깃발과 형광봉·호루라기 같은 응원도구를 챙겨왔고, 어떤 이들은 게임 속 캐릭터와 똑같은 복장을 입고 있었다. 미국인·중국인 등 외국인 팬도 눈에 띄었다.

 결승전에 올라온 두 팀은 ‘삼성 갤럭시’와 ‘SK텔레콤 T1’. 5전3선승제였다. 감독들의 신경전은 마치 프로야구 포스트 시즌에 올라온 감독들을 방불케 했다. 최병훈 SK텔레콤 감독은 “실력으로 따지든 우승 횟수로 평가하든 국내 최고 게임단은 SK텔레콤 T1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삼성 갤럭시 최윤상 감독은 “SK텔레콤의 우승을 예상한 전문가들의 의견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겠다. 승부를 5차전까지 가지 않고, 4차전 안에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경기마다 40분 이상 접전이 계속됐다. 관객들은 대형 화면 속 게임 캐릭터의 전투 장면에 환호와 탄성을 내질렀다. 게이머들은 무대 양쪽에 설치된 방음 부스 안에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전투를 이끌었다. 결과는 삼성의 3대 0 승리. 최강 SK텔레콤 게임단을 왕좌에서 끌어내린 이날의 경기로 향후 리그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접전 상황이 됐다.

 2014년 6월 롤은 10대 청소년은 물론이고 게임에서 손을 뗐던 직장인들까지 컴퓨터 앞으로 돌아오게 하고 있다. e스포츠 시장은 롤 덕분에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롤은 PC방 게임 이용 순위에서 지난해 7월 25일 이후 100주째 1위(6월 23일 기준)를 지키고 있다.

 롤 게임 제작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에 본사를 둔 ‘라이엇 게임스’다. 중국의 인터넷 회사인 ‘텐센트’가 지난해 지분을 투자했다. 국내에는 2011년 12월 서비스를 시작했다. 롤의 인기는 출시되자마자 가파른 상승세를 타기 시작해 3개월 만에 국내 전체 온라인 게임 가운데 점유율 1위(PC방 이용시간 기준)를 기록했다.

사실 롤은 아주 단순하다. 각각 5명으로 이뤄진 ‘레드’ ‘블루’ 두 팀이 상대방의 진지를 부수는 게임이다. 각 게이머는 게임에서 자신의 아바타(분신)를 정한 후 숲 속 괴물을 사냥하고, 적의 방어진을 부수고, 상대의 아바타를 제압하면 된다. 팀원 5명의 협업이 게임에서 승리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다. 아바타로는 110여 개의 캐릭터가 있어서 게임 참가자들 각각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이 선택한 아바타 한 명만 조작하면 되므로 게임하는 부담이 스타크보다 적다. 스타크는 건물을 짓고 병력을 만들어 싸우는 일대일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지난 8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 화정체육관에서 열린 ‘롤 마스터스’ 결승전을 관람하러 온 5000여 명의 관객들(위). SK텔레콤 게임단 선수들(아래 왼쪽)과 삼성 갤럭시 게임단 선수들(오른쪽)은 이날 롤 게임 국내 최강자 자리를 놓고 약 3시간 동안 접전을 벌였다. [사진 삼성 갤럭시 게임단]

보통 5명이 한 팀이 돼서 게임을 하는 롤은 축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축구에 포지션별로 포워드, 미드필더, 수비수, 골키퍼 등이 있듯 롤에서도 팀원들은 ‘탑’ ‘미드’ ‘정글’ ‘원거리 딜러’ ‘서포트’ 같은 포지션에 따라 움직인다. 탑은 가장 윗선에서 상대방과 대결을 벌이는 포지션이며, 미드는 게임 맵 정중앙에서 상대방과 허리 싸움을 벌인다. 정글은 게릴라와 비슷한 방식으로 상대방이 모르는 사이 기습을 하며, 원거리 딜러와 서포트는 후방에서 앞에 나가 있는 같은 팀원들을 지원한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지역 대표 대항전 ‘롤 월드 챔피언십’을 줄여서 ‘롤드컵(롤과 월드컵의 합성어)’으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올해 4회째를 맞는 롤드컵은 오는 9~10월 한국에서 열린다. 미국이 아닌 곳에서 롤드컵이 열리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롤드컵의 우승 상금은 골프 선수 박인비가 챙긴 US오픈 우승 상금(58만5000달러)의 두 배에 달한다. 지난해 LA에서 열린 롤드컵 결승전은 3200만 명 이상이 시청했다. 한국에서 유독 인기였던 스타크와 달리 롤은 전 세계에서 인기다.

 롤 관중이 늘면서 기업들의 프로게임단 창단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롤 프로게임단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은 삼성전자·SK텔레콤·KT·진에어·CJ·나진 등이다. 가장 먼저 롤 게임단을 창단한 회사는 CJ다. CJ 측은 롤 프로팀 후원을 통해 게임을 즐기는 10, 20대 청소년들에게 부쩍 다가갔다고 보고 있다. 지난 8일 경기장엔 삼성 게임단을 응원하던 한 10대 팬이 “이건희 회장님, 쾌차하세요”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네이버·티빙·다음·아프리카TV·트위치TV 등이 이날 경기를 생중계했는데 국내외 최고 동시접속자 수는 60만 명, 순방문자는 200만 명 이상을 기록했다.

 1998년 처음 등장한 스타크는 대대적인 인기를 끌며 한국 게임의 역사를 새로 썼다. PC방이 생겨나고 프로게임단이 창단됐다. 한때 “당구장이 속속 PC방으로 바뀌고 있다” “PC방 이용자의 70~80%는 스타크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인기는 대단했다. e스포츠라는 용어가 생겨났고, 이기석·임요한 등 스타 프로게이머들이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2007년 나온 스타크2가 활성화되지 못하면서 게임 시장은 ‘맹주’ 없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았다. 롤은 그 시장을 평정하며 새로운 맹주 자리에 올랐다. 조만수 e스포츠협회 사무국장은 “롤은 본인이 ‘하는 게임’에서 나아가 프로게이머가 하는 걸 보면서 즐기는 ‘보는 게임’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스타크의 뒤를 잇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막타·캐리·극딜 아시나요

롤 게임이 인기를 끌면서 관련 용어가 일상생활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막타’ ‘갱킹’ ‘캐리’ ‘극딜’ 등이다. 막타란 상대 아바타의 숨통을 끊는 마지막 공격, 갱킹이란 갱스터와 ‘ing’의 합성어로, 숨었다가 뒤를 급습하는 행위다. 또 캐리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팀을 이끄는 선수, 극딜은 상대편에게 극심한 피해를 끼친다는 뜻이다. 게임 이용자들은 이 말을 게임에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쓴다. 예컨대 “잘 차려진 밥상에 막타만 얹다니”라는 말은 고생은 남이 하고 자신은 마지막에 숟가락만 얹었다는 뜻이며, “땡땡이 쳤다가 교수님에게 갱 당했어”라는 말은 수업을 몰래 빠져나왔다가 교수님에게 걸렸다는 의미다. 삼성 갤럭시 게임단도 지난 8일 롤 마스터스 우승 직후 “팬 여러분, 캐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글귀가 쓰인 기념 현수막을 내걸었다. 우승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팬들의 성원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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