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2) 제64화 명동성당 - (2)신교의 자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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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나라에서 불완전하나마 천주교에 대한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기 시작한 것은 1886년4월 한불통상수호조약이 조인되고 나서부터다.
그 이전까지의 한국 천주교역사는 모진 박해로 일관되었었다. 크고 작은 박해가 1백여년 동안을 두고 계속됐었다. 그 가운데서 신유년의 박해, 기해년의 박해, 병오년의 박해, 병인년의 박해 등은 특히 혹심하여 소위 4대 박해라고 해서 길이 역사에 남을 일들이었다.
1801년 신유년에 일어난 박해 때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 외에 3백여명의 교우(신자)가 순교를 했고, 1839년 기해년의 박해 때에는 앵베르 범 주교를 비롯하여 2백여명의 천주교인이 희생당했다. 1846년의 병오년 대박해 때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외에 20여명의 순교자가 났고, 1866년의 병인년 박해는 가장 혹독한 것이어서 베르뉘 장 주교를 위시하여 약 1만명에 가까운 희생자가 났다.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단순한 배척이나 제지가 아니었다. 잡히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참수를 하거나 교수를 했다. 목을 베어 죽이거나 목을 매서 죽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몽둥이로 때려죽이기도 했다. 또는 옥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거나 병들어 죽게 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처참을 극한 혹형들이었다. 천주교인을 역적 다루듯 했다.
이러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는 자연 전교를 목적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 성직자들을 희생케 했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미국·중국 등 여러나라 성직자가 당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전교를 하고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성직자를 우리 나라에 보낸 나라가 프랑스였고 프랑스 신부가 가장 많이 희생을 당해야했다.
그것은 일찍부터 우리 나라의 전교를 담당하고 있던 외방 전교회가 프랑스 파리에 있었고 프랑스 성직자의 우리 나라 입국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그동안의 사정 때문에 프랑스는 우리 나라와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약에 종교문제를 명문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불통상상호조약에서는 프랑스 사람에 한하여 우리 나라에서의 신교의 자유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이 통상을 목적으로 서울·인천·부산·원산·양화진을 왕래할 때는 우리나라정부가 여권을 내주어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이와 같이 조약상에 종교문제를 명문화한 예는 우리 나라와 프랑스와의 조약에서뿐만 아니라 영국과의 통상수호조약의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다.
1883년10월에 조인되고 1884년4월에 비준된 한영통상수호조약에도 종교관계조항이 들어있는데 거기엔 영국상인이 서울·부산·인천·원산 등지에서 집을 세우고 점방(가게)을 낼 수 있으며 그들의 종교를 자유로 믿을 수 있다고 되어있다.
그 외 국가들과의 조약체결에서는 조약문에 종교문제가 들어있지 않았는데 이는 청국의 종용을 받은 우리나라정부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 한가지 예로 1882년에 조인된 한미통상수호조약 체결 때에도 청국의 마건충은 우리 나라의 전권대관 신헌에게 『만일 한미 통상수호조약에서 그리스도교의 전교에 관한 조항을 넣게되면 그로 말미암아 앞으로 한국에서 민란이 일어나 국제적 분쟁을 일으킬 염려가 있을 것』이라고 해서 그런 조항을 넣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런 청국의 작용도 있었지만 1882년 우리 나라와 독일간에 체결된 한독통상수호조약이나 1884년 우리 나라와 이탈리아간 및 러시아간에 체결된 한이통상수호조약과 한노통상수호조약에는 모두 종교문제가 들어있지 않았다.
이와 같이 다른 나라와의 조약에선 종교문제가 들어가 있지 않거나 들어가 있다해도 소극적인 규정에 그쳤는데 프랑스만은 상당히 적극적인 규정을 두어 프랑스 신부들의 한국내에서의 전교활동에 대한 안전보장의 길을 터놓은 것이다.
프랑스는 우리 나라와의 이와 같은 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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