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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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충북 중원에서 발견된 비석은 아직 명칭이 통일되어 있지않다. 순수비 혹은 척경비등으로 불린다.
문제의 열쇠는 글자 하나에 달려 있다.
비석의 첫머리에서 판독된 글은『을해오월일고려대왕상』. 바로 이가운데「해」자가 풍우에 씻겨 또렷치 않다. 학자들은 어렴풋한 흔적으로 보아「해」자일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이 비석이 고구려의 것이라는 확신은 여러 흔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고구려안의 신분과 관등 및 성이름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도「신라토내당주」라는 글귀는 역시 신라의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 된다.
신라의 것이라면「국중토내당주」라는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을해년이라면 사학자들은 문자왕 4년을 지적하고 있다. 문자왕은 고구려의 21대왕으로 서기 491년부터 519년까지 28년간 재위했다.
그는 장수왕의 손자로, 왕자인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장수왕의 뒤를 바로 이어 왕위에 올랐다. 494년(문자왕3)에 부여국을 쳐 항복을 받고 신라와 백제를 자주 침공했던 옛 기록을 보면 그의 위세는 당당했던 모양이다.
「삼국사기」속에도 이 비석의 내력을 암시하는 글귀가 보여 흥미 있다. 문자왕은 왕이 새로 얻은 남쪽땅을 순수하며 바다를 바라보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신라로부터 충주지방을 빼앗아 국원성을 설치한 것은 서기475년 장수왕63년 때였다. 그 뒤에도 소백산맥 지역에서 싸움이 잦아 문자왕3년에는 고구려의 세가 문경근방까지 뻗쳤다. 신라는 70년 뒤에 이곳을 탈환했다.
삼국시대의 지도를 펴보면, 고구려의 국세는 한때 오늘의 한반도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성기인 장수왕때는 대대적인 정복을 감행해 북은 송화강, 서는 요하를 넘었고, 남은 아산과 삼척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했다.
중원에서 발견된 비는 그런 전성을 과시하는 표말일 것이다. 이것은 중원군가금면용전리 입석부락 어귀에 세워져 있었다. 무려1천5백년이 지난 오늘에야 그것을 판독하고놀라움을감추지 못하는 것은 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그동안 역사의 이정표들을 돌아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더구나 부락 이름까지도「입석」이었던 것은 후세사람들의 무관심을 더한층 일깨워준다.
「묻혀진 역사」「숨은 역사」「풍화된 역사」를 되찾는 운동이라도 벌여야 하겠다. 역사학계의 분발에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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