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어느 교장선생님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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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올해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말았다. 집 앞에는 겨우내 헐벗은 채 앙상한 모습을 드러냈던 나무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듯 꽃잎을 터뜨리고 있다.

아마 티그리스 강가의 어느 조그만 마을에도, 사람들이 죽어라고 전쟁을 하건 말건 널브러진 시체와 자욱한 포연을 뚫고 봄은 잔인하게 찾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충남 예산의 어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은 이 봄의 문턱에서, 팔순이 넘은 노모에게 새벽 문안을 드린 뒤 개나리 진달래 만발했을 동네 뒷산에 올라 은행나무에 스스로 목을 매고 말았다. 무슨 절박한 심정이었길래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그가 목숨을 끊고 말았는가.

*** 전교조 개입으로 사건 커져

조그만 시골 초등학교의 교장이긴 했지만 그는 나름대로 평생을 교육에 헌신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명예로운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간제로 채용된 20대의 젊은 교사와 '사소한' 마찰이 벌어졌다.

그 교사는 차 시중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교장은 이를 부인했다. 그런데 여기에 전교조가 개입하면서 사건은 확대되고 말았다.

전교조 측으로부터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하라. 허위로 밝혀질 땐 용서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협박적인 전화에 시달리고 공개적인 서면 사과까지 요구받은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무너져 내린 교육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 다 합해야 65명, 교장과 교감을 빼고 나면 교사의 숫자가 예닐곱명 남짓한 학교에서 무슨 다툼이 그렇게 모질었을까.

나이로 보자면 아버지와 딸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 차 시중을 들었다고 그리 흉하게 보일 것도 없다. 설령 그런 시중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성폭행과 같이 파렴치한 행위도 아닌데 공개적인 서면 사과는 무엇이고 전교조는 거기에 왜 끼어들었는가.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이번 사건은 우리의 교육계는 물론,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대립과 반목이 얼마나 무섭고 지독한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의 역사는 좌익과 우익, 남과 북, 민주와 반민주, 영남과 호남과 같은 갈등이 빚어낸 깊은 상처로 신음해 왔다. 여기에 진보와 보수, 신구세대의 대립까지 더해지면서 상황은 이제 더 이상 치유되기 힘든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상대방에 대한 비판은 신속하고도 광범위해졌을 뿐만 아니라 익명의 논객들이 퍼부어대는 무책임한 언설은 입에 담기조차 힘들 정도로 원색적이고 야비해졌다. 상대방이 누구든지 일단 민감한 문제가 화제에 오르면 목에 핏대를 올리고 얼굴을 붉히며 싸우기 일쑤다.

어느 사회나 의견의 대립은 있을 수 있고, 자신의 주장을 통해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켜야 할 법도가 있고 넘어서는 안될 한계가 있다.

자기만이 절대적인 선이요 진리이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들은 타도돼야 할 대상이라고 하며 원수처럼 대한다면 그것은 이미 상식을 넘어선 이념의 횡포가 되고 만다.

강의가 한창 진행 중인 캠퍼스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확성기로 선동과 구호를 외쳐대고, 시위대는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서울 시내 도로 곳곳을 막아대며, 특정 신문에 글을 쓴 사람은 생매장될 각오를 해야 한다. 여기에 질서를 중시하는 태도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관용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 상대방에 대한 배려.관용 없어

사태가 이 지경이니 상식이 무너진 이 시대를 사는 마음 약한 사람들은 험한 꼴 당하지 않고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침묵하고 애써 무관심하려고 노력한다.

그저 자식교육.직장생활 잘 하면서 건강지키고 살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무심한 방관자로 남는 것조차 힘들어져 버렸다.

가정과 직장 어디에서도 이념의 무풍지대는 사라지고 말았다. 부모.자식 간의 대화에서, 절친한 친구들 사이의 농담에서 불신과 증오의 칼날이 일어서는 것을 느낀다.

복사꽃 만발한 어느 날 시골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의 죽음은 우리 사회를 무너뜨리는 무서운 대립이 갑작스레 찾아온 봄처럼 우리 모두의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金浩東 서울대 교수.동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