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C 세워 주가조작 865억 챙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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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합법적인 기업구조조정전문회사(CRC)를 설립한 뒤 구조조정 대상 기업을 상대로 주식 시세를 조종해 8백억원대의 이익을 올린 주가 조작 사건이 적발됐다.

증권선물위원회는 9일 세우포리머 등 4개사 주식에 대한 시세 조종 혐의로 기업구조조정 전문회사인 디바이너 대표 김모씨 등 12명을 검찰에 고발하고, 일반투자자 고모씨 등 2명을 검찰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사건을 조사한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그동안 CRC가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된 적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시세를 조종한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합법을 위장한 시세 조종=전직 증권사 직원과 시세 조종 전력이 있는 임모씨 등은 2001년 디바이너란 CRC를 설립해 구조조정 대상 기업의 유상증자 등에 참여하는 방법으로 주식을 모았다.

특히 CRC의 특성을 활용해 기존 주주가 아닌 특정 3자를 신주의 인수자로 하는 '제3자 배정방식 유상증자'에 참여함으로써 신규 발행주식의 대부분을 인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확보한 물량을 가지고 유통 물량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시세를 조작했다는 게 금감원의 설명이다.

금감원 조사에 따르면 디바이너는 특정 회사의 유상증자 청약권을 확보한 상태에서 개인투자자들에게서 펀드형식으로 자금을 모으는 사전예약매매를 통해 1차 자금을 조성했다.

이어 회사에서 받은 유상증자 물량을 투자자들에게 배분하지 않고, 이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또 대출받은 돈으로 증권계좌를 만든 뒤 이를 주 담보계좌로 설정해 사채업자나 상호저축은행에서 다시 돈을 빌리는 방법으로 거액을 모았다.

세우포리머의 경우 지난해 2월부터 10월 초까지 1백9개의 증권계좌와 1천1백억원의 자금을 동원해 4백76억원의 이익을 냈다. 디바이너는 4개사의 시세 조종에 1천5백억원을 동원해 모두 8백65억원의 이익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또 역할 분담을 통해 시세 조종에 따른 원가 분석과 목표주가 설정, 매수세 유인, 고가 매도 등 시세 조종 행위의 전반적 과정에 대한 철저한 사전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 확대 가능성 커=금감원은 디바이너 측이 지난해 10월 세우포리머 주식의 시세를 조종하던 중 내분으로 2백15억원 규모의 미수사고를 내자 조사에 착수했으며, 다른 기업의 주가도 조작했다는 제보에 따라 조사를 확대했다.

금감원은 "이번 사건은 현대전자.이용호 게이트 등을 제외하고는 최근 2년 동안 적발된 주가조작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라고 밝혔다.

금감원은 또 "이들이 금감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충청 및 제주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 3백여개의 차명계좌를 개설하고 현금 위주의 자금거래와 매매 분산 등 치밀함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금감원은 CRC가 관여된 주가 조작 사건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조사를 확대할 계획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수많은 CRC와 기업 구조조정 투자회사(CRV)가 생겨났는데 이번 사건에서처럼 일부 회사가 기업 구조조정이란 특성을 악용해 시세 조종에 가담한 곳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펀드 모집에 수많은 개인 투자자가 참여하는 등 이해 관계자들이 얽혀 있어 조사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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