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앞당겨 빗장 풀고 1066% 관세 … 수입량 안 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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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농민들 뜻대로 쌀 개방(관세화) 시기를 더 늦추기 위해선 세계무역기구(WTO)가 이를 승인해야 한다. 필리핀은 지난주 “쌀 개방 시점을 2017년 7월로 미뤄달라”는 요구를 WTO에서 관철시켰다. 이에 국내 쌀 농가에서도 필리핀 사례가 거론되면서 “정부가 개방 유예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하지만 정부는 필리핀의 결정이 옳다고 보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우선 필리핀이 이를 대가로 쌀 의무수입 물량을 현재보다 2.3배로 늘리고, 다른 수입 품목에 대한 관세 인하를 조건으로 WTO에서 개방 유예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필리핀으로선 식량 자급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 같은 출혈을 감수하는 것도 검토해 볼 만한 상황이었다”며 “다만 축산물 검역 절차와 같은 비관세 장벽 완화에 대한 이면합의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게 사실이라면 필리핀으로선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부가 모범사례로 보는 곳은 일본과 대만이다. 일본은 1986~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당시 2001년부터 쌀 관세화를 실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99년에 개방을 결정했다. 관세화 유예기간 동안 의무수입량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것보다 고율 관세를 매기는 조건으로 개방하는 것이 자국의 쌀 농가 보호에 이익이 될 것으로 봤다는 게 정부의 분석이다. 당시 일본은 1066%의 관세를 매겼다. 이전까지 일본의 쌀 수입량은 연평균 1만8000t이었는데, 개방 이후 수입 규모는 1만8100~1만8300t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대만도 2003년부터 종전의 관세화 유예 기간을 연장할 수 있었지만 이 권한을 포기하고 개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본과 같은 판단을 한 것이다. 당시 관세율은 563%로 정해졌고, 수입량은 기존 물량보다 연간 500t 느는 데 그쳤다고 정부는 설명했다.

 필리핀처럼 ‘개방 유예 연장 요구’카드를 꺼내보지도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정부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해외 주재원을 통해 WTO 주요국에 우리 농민들의 주장을 대변해왔고, 여러 여건을 고려해 정부 입장을 정한 것”이라며 “이제는 한국 쌀 경쟁력을 높이는 데 정부와 힘을 합하는 게 농가에 더 큰 이익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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