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뜸 들였지만 … 설익은 쌀 개방 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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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의 노력도 안 해보고 개방 결정하나!”(농민)

 “충분한 협의와 검토를 거쳐 관세화(개방)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정부)

 20일 경기도 의왕에 있는 한국농어촌공사 대강당. 이곳에서 열린 ‘쌀 관세화 유예 종료 관련 공청회’에선 쌀 개방에 대한 정부와 농민 간의 뿌리 깊은 의견차이가 재확인됐다. 정부는 “국제 협정 내용이나 국내 현실을 감안했을 때 쌀 관세화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혔고, 농민들은 “미리 결론부터 내려놓고 개최한 요식 행위 공청회”라고 비난했다. 공청회 내내 정부 관료나 개방 의견을 가진 전문가 발언이 나올 때마다 농민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그럼에도 이날 쌀 개방에 대한 정부 입장이 공식적으로 드러나면서 후속 절차 이행에는 속도가 붙었다. 남태헌 농림축산식품부 대변인은 23일 주간정책브리핑에서 “이르면 30일 경제부총리가 주재하는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쌀 관세화 가 안건으로 채택될 수 있다”고 말했다.

 쌀 관세화 유예 기간이 올해 말 끝나게 되면서 개방에 대한 논란이 다시 거세지고 있다. 현재 한국은 쌀 개방을 하지 않는 대신 일정 규모씩 의무수입량을 늘려가고 있는데, 내년에도 이 수입량에 제한을 둘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정부와 농민 간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정부는 수입쌀에 높은 관세율을 매겨 국내 시장을 보호할 수 있다는 뜻에서 ‘개방’이라는 말 대신 ‘관세화’를 공식 용어로 쓴다. 현재 이 관세화를 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과 필리핀뿐이다.

 한국은 1994년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쌀 시장을 개방하기로 국제 사회에 약속했다. 다만 쌀이 한국인의 주식이라는 특수성을 강조해 올해까지 개방 의무를 면제받고 있다. 협정문은 이를 ‘특별대우’로 표현하고 있다. 그 대신 1995년 5만1000t의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했고, 그 양을 점점 늘려 왔다. 올해 쌀 수입량은 40만9000t이다.

 정부는 쌀 관세화를 하는 게 국내 쌀 농가에도 이익이 될 거라는 논리를 편다. 지난해 소비된 쌀은 449만1000t인데, 여기에 8.6%(38만8000t)에 해당하는 쌀이 의무수입 명목으로 외국에서 들어왔다. 한국산 쌀값의 3분의 1 수준인 미국 쌀도 함께 국내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실제 수입 쌀이 국내 식당 일부에서 원산지 표시를 하지 않거나 국내산 쌀과 혼합된 형태로 제공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의 관세만 매겨진 수입 쌀이 국내 시장을 잠식해 가고 있는 것이다. 고려대 이재형(국제법)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만약 쌀 관세화를 유예한다면 지금처럼 낮은 관세에 수입해야 하는 쌀의 양을 더 늘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수입 쌀의 국내 시장 잠식이 더욱 심해져 쌀 농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정부가 낸 대안은 쌀 시장을 개방하는 대신 높은 관세를 매기는 것이다. 지난해 국내산 쌀의 평균 가격은 ㎏당 2189원이었다. 하지만 미국 쌀 가격은 791원에 불과했다. 관세율을 300%는 매겨야 국내산 쌀의 가격 경쟁력이 유지되는 것이다. 일본은 1999년 쌀 개방을 할 때 1066%의 관세를 매겼고, 대만도 2003년 개방 때 563%로 관세율을 정했다. 따라서 300% 정도는 문제되지 않을 거라는 게 정부의 논리다. 하지만 미국 등 쌀 수출국들은 150~200%의 관세율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이날 공청회에 참석한 한 농민은 방청석에서 “대통령이 국민 앞에 나서 쌀 수입 관세 300%를 약속하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주제발표에서 송주호 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환율과 국제 쌀 시세에 따라 76% 관세율 수준에서도 국내산 쌀의 가격 경쟁력이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을 땐 방청석에 앉은 농민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반면 쌀 관세화 반대 측 토론자로 참석한 박형대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정책위원장은 “쌀 관세화 유예 종료는 관세화를 의미하지 않는다”며 정부 의견을 반박했다. 정부 논리는 협정에 따라 쌀 관세화 유예 기간이 올해 종료되기 때문에 2015년 1월부터 관세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에 박 위원장은 “그렇다고 관세화 의무가 새로 발생한다는 내용 또한 협정에 없다”고 말했다. ‘혜택 종료=의무 발생’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면서 “이미 관세화를 기정 수순으로 보고 있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유예기간 연장 요청을 하는 방안도 분명히 검토해볼 만한데, 정부는 이를 해보지도 않고 농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한다”고 했다. ‘고율 관세를 매기면 된다’는 개방 찬성론에 대해서도 “고율 관세가 영구불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며 “관세 감축에 대한 압력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고 이에 따른 양보를 피할 방법이 없어 결국 식량주권 확립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다만 또 다른 농민단체인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의 손재범 사무총장은 “관세화 유예를 요청하면 쌀 수입 물량이 전체 소비량의 20%까지 증가할 수 있어 국내 농업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며 “높은 관세와 농가소득안정방안 마련을 정부가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민 사이에서도 의견차가 있다는 뜻이다. 공청회가 끝난 뒤 전농·한농 소속 농민 간에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부는 관세화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여기엔 쌀이 주요 식량으로서 지위를 잃어 가고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실제 관세화 유예 초기인 1995년엔 1인당 106.5㎏씩 쌀을 먹었다. 한 사람이 1년에 공깃밥(200g 기준) 532그릇 분량을 소비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 양은 지난해 336그릇(1인당 67.2㎏ 소비)으로 줄었다. 지난해 1인당 하루에 먹은 쌀의 양(217.7g)도 1995년(303.0g)에 비해 28% 줄었고, 식품소비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1995년 19.9%→2013년 14.2%)도 매년 줄고 있다. 김경규 농식품부 식량정책관은 “한정된 여건에서도 농업예산 지원이 쌀에 집중돼온 경향이 있다”며 사실상 시장 개방 의지를 알렸다.

의왕=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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