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왕족 채용하고, 프로젝트 직접 발굴하고 … 수주산업 상식 바꾼 페트로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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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
보스턴컨설팅그룹
서울사무소 파트너

‘입찰 공고가 나온다. 전략을 짠다. 경쟁자의 동태를 살피고, 마침내 입찰가를 정한다. 입찰한다. 프로젝트를 수주한다. 만세를 부른다. 공사를 진행하며 대금을 받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주산업의 일상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상식을 깨면 다른 길이 보일 수도 있다. 영국의 페트로팩이라는 오일·가스 설계·구매·시공 일괄 시공사(EPC)가 좋은 예다. 이 회사는 EPC 수주산업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단기간에 강자로 우뚝 섰다.

 페트로팩의 역사는 길지 않다. 1981년 설립돼 91년에야 EPC 사업에 뛰어들었다. 테크닙 같은 거인이 군림하는 시장에 늦게 진입했기 때문에 남다른 전략이 필요했다. 수주산업은 속성상 프로젝트가 주어질 때만 일을 할 수 있는 수동적인 업종이다. 하지만 페트로팩은 기다리는 대신 프로젝트를 발굴하고 만들어 내는 길을 택했다. 우선 정교한 방법론과 기준에 따라 목표 국가를 골랐다. 판단의 기준이 될 현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전 세계 20여 곳에 사무소를 운영하는 등 촘촘한 네트워크도 깔았다.

 인사 정책도 남달랐다. 타깃 국가의 정보를 수집하고 또 적극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어내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오만·말레이시아 등 주요 이슬람 산유국의 왕족 출신을 적극 고용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유학하고 있던 왕족이 주로 채용 대상이 됐다. 영국에 유학 온 중동 왕자들은 훗날 가문의 석유사업을 물려받기에 앞서 경영수업을 받고자 기꺼이 이 회사에 입사했다. 훗날 이 남다른 인맥이 중동 지역에서 영업과 마케팅에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페트로팩은 또 남들이 외면하는 100만 달러 이하, 소규모 입찰건에 주목했다. 소형 프로젝트를 그대로 수주하지 않고 다른 프로젝트를 덧붙이고 계약 유형을 바꿔 중대형 프로젝트로 탈바꿈시켰다. 이를 발주자에게 제안해 다시 수주하는 것을 주특기로 삼았다.

 이 같은 ‘씨 뿌리는 영업’이 처음부터 성과를 낸 것은 아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회사는 한국 EPC 업체에 비해 한 수 아래로 취급받았고, 대형 프로젝트 수주 능력이 없는 업체로 여겨졌다. 하지만 뿌려둔 씨앗에서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2000년대 들어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지금은 육상플랜트 EPC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성장성과 수익성을 내는 기업이 됐다. 페트로팩은 언제 프로젝트가 나올지, 발주자의 입만 쳐다보는 천수답 영업에서 선행 영업으로 게임의 룰을 바꿨다.

김성준 보스턴컨설팅그룹 서울사무소 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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