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농촌 어린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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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는 촌에서 마로(뭣하러) 사노?/도시에 가서 살지/「라디오」에서 노래하는 것 들으면 참 슬프다/그런 사람들은 도시에 가서/돈도 많이 벌일게다./우리는 이런데 마로 사노?』-10년 전 경북의 국민교 2년생이 작문시간에 지은 시다. (이오덕 저 『일하는 아이들』중에서)도시로 도시로 쏠려가는 농촌의 눈길, 그것은 지난 20여년간 「산업화」 「근대화」의 우리 한국의 변함없는 현실이었고, 그리하여 그 그림자는 바로 이곳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더욱 선명하게 새겨져왔다.
도시, 또는 서울이 이들 어린이들에게는 선망의 꽃이고 따라서 「시골에 남아 산다」는데 대해 때로는 이렇게까지 슬프게 비쳐지기도 한다.
「보릿고개」의 가난 속 배고플 때도 서울로 가기만 하면 될 것처럼 생각해왔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화려한 어린이잡지를 보면서, 그리고 70년대로 넘어와선 「텔리비전」을 통해서 또 다른 「배고픔」을 그들은 겪고있다.

<나도 서울 갔으면 좋겠다>
모든 것은 다 서울에서 일어나고 그곳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심지어 TV광고에 나오는 과자 하나라도 「서울처럼」갖고 싶은 것이다. 『나는 서울을 갔으면 좋겠다/서울가면 기술도 배우고/돈도 번다/그런데 가면 사람도 약아질게다.』 (『일하는 아이들』중에서 안동대곡 분교2년 이승영작) 이런 마음은 누구나 어느 순간 한번 가져보는 우리 한국농촌의 이야기다.
지난 30여년간 농촌의 국민학교 교사로 지내온 이오덕씨(54·경북 안동군 임동면 길산국민학교 교장)는 이 어린이들의 거짓 없는 이야기들을 모아 77년에 『일하는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냈고 올해 다시 농촌어린이들의 산문을 모아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라는 책을 냈다.
『오늘 소 뜯기로 가니까 어디서 논매기 소리가 들려왔읍니다. 우리도 크면 저런 농부가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북 상주 청리국민학교4년 최인모)
끊임없이 서울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오늘 한국의 농촌 어린이들은 일하는 즐거움과,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자연을 어떻게 호흡하고 있을까.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지난 20년간 농촌어린이들의 생각과 생활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국민학교 작문시간에 써낸 솔직한 이들의 글 속에서 찾아보자.

<보릿고개 걱정하던 시절>
『우리는 날씨가 좋아도 가마니를 쳐야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거름을 사서 보리를 가꾸어 먹어야합니다. 거름을 안하면 곡식이 잘 안되어서 보리 대공이가 크다가 안커서 보리알이 여물지 않읍니다. 그냥 빼짝 말라서 타작을 하면 다 나가고 여물은 것은 절반도 안되지요. 그래서 쌀 날 동안 우째 먹고 살아나갈 생각을 하니 기가 맥힙니다.』 (l959·상주 공검 2년김석님)
『오늘 다섯째 시간에 우리들은 벌레집과 송충이 알을 긁었다. 나는 배가 참 고팠다. 아침에 죽 한그릇 먹고 와서 이때까지 입에 대어본 것이 없다. 오후에 집으로 가는 데 점방에 있는 과자라도 다 집어먹겠다고 생각되었다. 돈이 있으면 대분에(금방) 쓸것이라고 생각되었다.』 (1964년·상주 청리5년 김희옥)

<고추밭 잘 매면 옷 사준다>
50년대, 60년대 농촌의 가난을 이 어린이들은 절실하게 그리고 있다. 점심시간에 밥을 못해가서 교실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자기모습을 그려낸 어린이, 『어머니는 내 점심밥 할 것이면 우리 식구 한끼 죽을 끓일 쌀이라고 말하셨읍니다.』(정운삼) 그리고 이 가난은 도시로 뗘나야 하는 가족의 이야기로도 연결된다.
『아침때 언니가 함창 남의 집에 가는데 「버스」에 타면서 언니가 웁니다. 나도 눈물이 났읍니다. 나는 언니가 함창 남의 집에 가는 기 안됐읍니다.』 (l958·공검 2년 권두임) 남의 집살이를 떠나는 언니는 60년대로 넘어오면서 공장으로 옮겨 떠나고….
『내 옷은 만날(매일) 빨간 「도꼬리」와 까만 「쓰봉」을 입고 다니다가 남모가 입던「도빠」(오버·코트)를 입고 다닌다. 나는 만날 12시까지 공부해도 새옷을 안사주고 새옷 달라하면 때리고 설에 입는다고 나둔다.』 (l969·안동 대곡분교 2년 김선모)
『오늘 신작로에서 고무줄을 했읍니다. 나는 고순이하고 하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들에 가다가 신 떨어진다고 하지 마라 합니다. 그래도 나는 했읍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또 돌아보고 막 머라합니다.』 (1958·상주 공검2년 임남순)
도시의 어린이들은 물론, 오늘의 농촌어린이들도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그런 가난, 이제 그런 가난은 드물다해도 그러나 농촌과 도시를 갈라놓는 것은 무엇보다 「일하는 어린이」의 모습이다. 그리고 자연과 이야기하는 동심의 세계가 점점 서로 깊게 달라지고 있다.
『나는 고추밭을 땄읍니다. 아버지하고 누나하고 나하고 맸읍니다. 고추씨가 단(빽빽하게 난)데도 있고 안단데도 있었읍니다. 기심(잡풀)이 많았읍니다. 아버지는 고추가 잘 되면 팔아서 옷 사주까 합니다. 고추밭 빨리 매라고 합니다.』 (1970·안동 임동동부3년 정창교)
『어제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쿵 타작을 하는데 나는 하다가 안할라고 우리 나무 있는데 숨었다가, 우리 변소 있는데 숨었다가 할머니가 와서 쿵타작 안할라코 숨었다고 그카까봐 경지(부엌)에 가서 어머니 밥하는데 불을 때주고 나서 국자로 장을 떠놓고 장물(국)도 상에 놓았다. 놓고 가만히 박근옥이네 집에 가서 고무줄을 하고 놀았다.』 (1963·상주 청리3년 김순옥)

<도시선 귀한 자연을 호흡>
『나는 어머니하고 강에 갔읍니다. 쌀을 자루에 5되 이고 갔읍니다. 어머니는 한말을 가주갔읍니다. 임동 가서는 쌀을 팔았읍니다. 강을 봤읍니다. 다보고 난 뒤에 점심을 먹었읍니다. 먹고 집으로 왔읍니다. 논에 치는 약하고 기름 한병하고 가지고 왔읍니다.』 (1978·안동 길산2년 김수미)
농사일에서부터 설겆이·집안일·아기보기, 그리고 장보기에까지 농촌의 어린이들은, 특히 많은 일손이 도시의 공장으로 쏠리는 최근에는 더욱 일이 많아졌다. 「시기미(쇠먹이 풀) 가면 고개가 저며진다는 어린이에서부터 어느 공무원의 아들은 『다른 친구들처럼 농사일을 시키고 공부하란 말을 덜 했으면 좋겠다』고 까지 했다. 그들에게 있어선 농사일이 커다란 생활이다.
『어제 아침에 학교 제비가 전깃줄에 앉아서 재재골 재재골 합니다. 보니까 입 있는데 빨갑니다. 빨간데서 재재골 재재골 합니다.』 (이순희·3년)
『오늘 아침에 옥자하고 꽃밭에 가보니 도라지가 내 눈에는 배추같았읍니다. 미나리 꽃나무가 시들어진 것 같다. 그래 일라 살았다(일으켜 세웠다).』 (정항숙)
『감꽃이 피었네. 감꽃은 노랗습니다. 이화와 내와 감꽃을 주웠읍니다. 감꽃을 주우니까 무슨 새소리가 들려왔읍니다. 아, 새소리도 곱다하며 말했읍니다. 새소리를 듣고 나서 감꽃을 많이 주우면서 노래를 불렀읍니다.』 (남경자·2년) 이런 자연의 마음을 오늘의 도시어린이들은 과연 얼마나 새기고 있을 것인가. <윤호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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