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질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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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기미년의 새날. 70년대의 마지막 길목에 들어선다.「능률과 효과」만을 내세운 70년대 성장의 뒤안길에서 잊혀온 생활의「모럴」-그것은 질서의식이었다.
참고 기다리며 양보하고 이해하는 생활질서. 지난 한세대 동안 외면 되어온 질서의식이 이제 제자리를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정류장·우체국창구·학원·관공서의 민원창구·경제계 등 어디나 할 것 없이 새로운 질서를 뿌리내리려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고 있다.
80년대의 문턱인 새해에「성숙한 질서」확립을 위한 의지를 펼친다.
『바쁘다 바빠』인기「탤런트」K씨가 안방극장에서 서민생활의 바쁜 일상(일상)을 나타낸 이 독백은 70년대 한국의 눈부신 성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유행어로 한 외국의「매스컴」에 소개됐다.
지난 10년 동안 고속도로를 닦고 쉴새없이 건물을 헐고 세우며 공장을 짓고 지하자원을 개발하며 상품을 만들어 수출해「달러」를 벌어들이느라 눈코뜰 사이 없이 바빴다.
성장을 위한 이 바쁜 나날 속에 남을 제치고 한발 앞서는 것이 잘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로 잘못 이해되어 왔다.
「샐러리맨」김덕배씨 (36·서울강남구서초동)는 구랍 27일「부친위독」의 전보를 받고 고향인 대구로 가기 위해 서울역 새마을호 매표창구를 찾았으나「매진사례」.
김씨는 고급 공무원인 삼촌에게 지원을 요청, 전화 1통화로 역장의 인사까지 받으며 특등석에 않을 수 있었다.
매표 창구 밖에는 새벽부터 줄을 서 있는데도 창구 안에는 전화 한 통화로 표를 확보할 수 있었다.
H씨 (32·서울관악구반포「아파트」)는 보름 전 서울 중구 태평로 S「빌딩」에 마련된 국제소포 송달창구를 찾았다.
60여명을 앞에 두고 줄을 서 3시간30분을 기다려 겨우 선물을 부쳤다.
그러나 H씨보다 늦게온 동료 K씨는 새치기로 20분이나 빨리 창구를 떠났다.
수출회사 사원 박인수씨(37·서울서대문구연저동)는 직강생활 10년에「줄서는 것이 바보지」라는 것을 배웠다.
77년 한 햇동안 신규「아이템」인 개털 옷을 개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보신탕집을 찾아 원료를 확보하고 독일·「프랑스」등에「바이어」를 심어놓았다.
신규 수출품목 신청을 냈으나 기각, 기초투자비 1억원을 날려버렸다. 당국자는 외국의 애견가협회에서 보낸 항의전문 때문이라고 기각 이유를 설명했지만 실은 경쟁업자의 농간이 크게 작용했음이 뒤에 밝혀졌다.
좌절감을 느낀 박씨는 남은 재산을 정리, 무역소개업에 손대 쉽고 빠른 돈벌기 방법을 택했다.
70년대 후반을 화려하게 수 놓았던 제세산업·원기업·S교역 등 벼락 기업들의 명멸(명멸)은 「줄 안서기」의 좋은 예.
제세산업의 30대 실무진 1명이 거래은행의 지점장 앞에 나타나『1백만원을「커미션」으로 줄테니 l억원만 대출해달라』고 태연스럽게 요구한 것은 은행가와 수출업계에 널리 알려진 일화.
이런 식으로 자본금 1천만원으로 시작한 햇병아리 기업이 불과 2∼3년만에 몇억·몇10억원으로 불어나는 기업 풍토는 줄 안서기의 표본으로 꼽힌다.
특권의식과 특혜의식이 줄서기 규범을 흐트러 뜨린다.
현대「아파트」특수 분양사건은 바로 이 특혜의식이 빚어낸 또 하나의 줄 안서기 예.
작은 돈을 푼푼이 모아 주택청약예금에 가입, 「아파트」추첨 자격을 얻고도 5,6차례씩 낙첨한 알뜰 주부들을 제치고 일부 지도급 인사들은 태연히 특혜를 누렸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끈질긴 줄서기 정신이 싹트고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행렬, 도서관 앞의 향학 대열, 공단여공의 전전한 질서 의식 속에 줄서기 정신이 자리를 잡아간다.
정독도서관 (서울종로구화동)은 줄 서기의 시범장소. 새벽 4시 통금해제와 함께 몰려든 8천여명의 중·고생 및 재수생들이 개관시간인 상오 7시까지 줄을 선다.
열람석 3천5백42석 규모에 매일 2∼3배의 인원이 붐빈다.
미처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은 대기표를 받아 쥐고 낮 12시까지 무작정 줄을 서면서 기다린다. 이 도서관 단골인 이정훈군 (19·재수생·서울마포구아현동)은 『경쟁의식을 키우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다』며 『이제 줄서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고 말한다. 13년 여공 이순이양(28·제15회 수출의날 동탑훈장수상·태복섬유공업사여공)은 성실과 근면의 표상.
고참 여공에 주어지는 조장직도 마다하고 언제나 후배들과 함께「미싱」틀을 떠나지 않았다.
이양은 13년을 한결같이 작업 현장을 지키며 고된 일을 도맡아 걸핏하면 남을 헐뜯고 앞지르려는 직장의 악습을 고쳐 나갔다. 성남시의「러시아워」는 새벽 6시부터 시작된다. 서울왕십리에 직장을 둔 심기섭씨(40·성남시신흥동215의40) 는 새벽 6시에 집을 나선다. 종점에서 40여분 동안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린다.
동이 틀 무렵엔 이미 줄이 3백여m나 늘어진다.
줄서기 습관은 어지러운 생활 태도를 바로잡는「성숙한 질서」의 첫 걸음. 기다림으로 줄을 서면서 새해를 맞는다. <김원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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