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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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나이로비」 시내에는 「우후루」공원도 있고 「우후루」가가 있다. 「캐냐」연감의 제목도 「우후루」다. 그것은 「아프리카」 신생국의 독립을 찬양하는 거국적인 구호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건국 초기에 부통령을 지내다가 지금은 야인으르 있는 「오딩가」라는 정치인은 『「우후루」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제목의 자서전을 썼다가 말썽이 되어 그 책이 판금 당했다. 그러니까 「우후루」가 왔느냐 안 왔느냐는 말장난 같은 논쟁은 독립을 쟁취한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폭발의 잠재력을 안고 있음이 분명하다.
60년대 초 독립의 선풍이 몰아치던 「아프리카」로부터 들려온 현란한 「아프리가」 민족주의의 구호들에 귀가 익은 방문객으로서 처음 이 대륙에 발을 딛는 순간에 느끼는 충격은 식민시대의 잔재가 아직도 너무나 많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코트디브와르」(아이버리코스트)가 독립된 60년, 이 나라에 남아있던 「프랑스」인은 1만명 안팎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수가 5만명으로 불어나 있다.
처음부터 식민시대와의 분명한 단절을 거부했던 「우푸에브와니」 대통령은 지금 「아이버리제이션」운동을 펴고 산업과 행정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프랑스」인을 자국민이 인수하고 있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 작업은 30% 또는 60%가 진척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티아살」의 지방법원 판사로 있는 「아테」씨는 『당장 「프랑스」인 들을 싹 쓸어버려도 우리는 잘 해 나갈 수 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아직도 여기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며 「아이버리제이션」의 느린 속도를 개탄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비교적 강경 노선을 걷고 있는 「잠비아」에서도 식민지 시대와의 단절은 분명한 선을 긋지 못하고 있었다.
이 나라 의사당에 들어가다가 정면 벽에 걸린 3개의 거대한 초상화에 눈이 갔다. 가운데 하나를 제외하고 2개가 백인의 초상화였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다. 누구냐고 안내하던 의사당 공보관에게 물었더니 『식민정부의 마지막 총독과 식민의회의 마지막 의장』이라는 대답이었다.
「우후루」를 찬미하는 신생국에서의 그런 초상화를 그대로 걸어 놓고 있는지 안내인은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루사카」 시내의 명소 중의 하나인 「자유상」은 「아프리카」인이 영국 식민시대의 굵은 쇠사슬을 끊고 만세를 부르는 통쾌한 동상이다. 그런데 그걸 조각한 것은 영국인 「제임즈·버터」라고 공보성의 안내인은 스스럼없이 설명했다.
우리 나라의 독립문이 일본인에 의해 건립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쳐갔다.
이런 현상은 외국인의 눈으로 비판하고 그 다음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서 「아프리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아프리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화 작업이 곧 서구화와 통한다는 어쩔 수 없는 명제 속에 들어있다.
과거의 미개성에서 탈피하고 서구 식민세력이 강요한 세계경제 질서 속에서의 약자의 입장을 타개하기 위해서도 현대화는 시급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구의 도움이 필요하고 도움을 계속 받다보니 「우후루」는 완벽한 형태로 오지 않는다.
그런 「딜레머」는 「로디지아」와 전쟁상태에 있는 「잠비아」가 「로디지아」와 남「아프리카」로부터 동 광산의 기계를 수입하고 있는 뼈아픈 모순으로 예시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신 식민주의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양파 현상」이라고도 이름짓는다.
벗겨도 벗겨도 서구의 껍질 속에는 완숙한 「우후루」의 열매가 나오지 않는다는 현실주의적 전망이다.
그러니까 「우후루」가 왔느냐 안 왔느냐는 논쟁은 「아프리카」의 미래와 직결된 거대한 숙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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