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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On Sunday

잊혀질 권리와 추억할 권리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하루카씨’의 글은 4월 15일 0시52분에 올라왔다. “내일 제주도로 3박4일 수학여행을 가는데 밀린 애니(애니메이션)들을 못 봤다”고 했다. 유명한 게임 커뮤니티 게시판이지만 댓글이 3000개나 달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밀린 애니 아직 많으니 대답해라” “차라리 거짓말이라 해라” “너 주려고 신형 플레이스테이션(게임기) 구해놨다”…. 소리 없이 울부짖는 댓글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잘 다녀왔다”는 하루카씨의 댓글은 끝내 달리지 않았다. 하루카씨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안산 단원고 2학년 최모군의 아이디다. 커뮤니티 유저 몇몇이 ‘밀린 애니’가 든 외장하드를 그의 납골당에 넣어주었다.

“임용 합격했어요. 항상 학생을 생각하는 선생님이 되겠습니다”라는 메시지는 지난해 2월에 올라와 있었다. 선생님이 되고 처음 맞은 스승의 날 사진도, 아이들이 빚어줬다는 추석 송편 사진도 그의 페이지에는 그대로 남아 있다. 착실하고 다정하던 2년차 선생님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접속해 사람들의 친구 신청을 받아주지 못한다. 전체 공개가 된 글들만이 주인 잃은 집을 지키고 있다.

인터넷상에 남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글과 그들의 공간은 아직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다. 아직 익숙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도 망자의 사이버상 기록을 정리하는 ‘디지털 장례식’ 업체가 등장하고 있다. 지난달엔 유럽사법재판소(ECJ)가 ‘잊혀질 권리’를 처음으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구글은 지난달 30일부터 인터넷 검색 시 노출되는 개인정보 삭제 요청을 받기 시작했다. 첫날부터 신청자 수가 1만2000명이나 됐다. 국내에선 방송통신위원회가 오는 16일 인터넷 정보 삭제 요구권에 대한 콘퍼런스를 연다. 얼핏 ‘남겨지는 것’보다 ‘잊혀지는 것’에 대한 선호도가 더 높아지는 분위기다.

문득 내가 떠난 뒤 내 기록을 삭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생겼다. 다시 보면 지우고 싶은 허세 가득한 140자짜리 SNS 메시지도, 미니홈피에 남아 있는 고3 시절 퉁퉁 분 모습도 ‘디지털 장례식’ 한 번으로 깨끗하게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남들이 나를 ‘추억할 권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예쁘게 나온 사진과 내가 봐도 제법 잘 쓴 글만이라도 남겨둔다면 누군가에게 나를 추억할 권리는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세월호 침몰 사건이 일어난 지도 두 달을 넘겼다. 잊혀질 권리를 이야기하는 세상이라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안타깝게 생을 달리한 아이들의 홈페이지를 들여다보고, 그가 남긴 게시글을 찾아보며 희생자들을 추억하고 있다. 언젠가는 ‘하루카씨’의 글이 실린 커뮤니티가 폐쇄될 수도 있고, ‘2년차 선생님’의 공간이 있는 페이스북이 사라질 수도 있다. 바라건대 그들의 기록만큼은 어느 한곳에 따로 보존돼 오래 남아주길 바란다. 그것이 한낱 가벼운 수다에 불과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의 생전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료이니 말이다. 일반 시민들의 ‘그들을 추억할 권리’를 누군가가 지켜줬으면 좋겠다.

유재연 사회부문 기자 que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