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5)제61화 극단「신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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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음악인 「이요안나」씨 도움으로 유치진작 『단국』의 막은 올랐지만 그 무대는 「극협」만을 위한 무대는 아니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요안나」씨는 그가 조직한 「탱고」악단의 공연을 가졌는데 음악만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연극을 곁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곁방살이 출발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런것 저런것 가릴 겨를이 없었다. 어려움 끝에 무대에 설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격했기 때문이었다.
유선생이 직접 연출을 맡았었는데 우리들의 연습은 피나는 것이었다. 이화삼이 일본헌병역을, 김선영이가 어머니역을, 그리고 내가 주인공인 정도란 청년역을 맡았었다.
그러나 우리의 열연과 부푼 기대와는 달리 1주일동안의 연극의 성과는 신통치가 못했다. 여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같은 날짜에 국도극장에선 좌익연극인들이 총동원된 함세덕작 『태백산맥』이란 연극이 공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백산맥』은 대단히 선동적인 내용의 연극이었는데, 일제에 억눌렸던 당시의 대중들에겐 큰 자극을 주었었다. 그뿐만 아니라 좌익연극인들이 모두 발벗고 나서서 관객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극성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극협」의 두번째 공연작품은 『자명고』였다. 역시 유선생의 작품이었는데 고전성격의 이 작품을 택한 이유는 당시 극한 상황의 「이데올로기」 분쟁속에 민주·민족적인 주체성을 외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명고』의 배역은 김동원과 김선영이 주연으로 각각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역을, 이화삼이 낙랑왕, 그리고 내가 중국인 왕초역이었다. 이 『자명고』는 『조국』과는 달리 대단한 성공이었다.
당시 연극 상설관 국도극장의 대관조건은 꽤 까다로왔다. 하루 관객수가 3천명에 미달하면 일방적으로 공연을 끝내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주일동안 구럼처럼 몰리는 관객들로 연극은 대성황을 이었다.
이 『자명고』 공연시 잊을수 없는 일은 현신민당대표최고위원 이철승씨의 협조였다. 이씨는 당시 전국학련회장이었는데 좌익연극인들의 공연방해를 이씨가 나서서 막아 주었던 것이다.
민주진영으로선 유일하게 정돈된 「극협」의 출현은 좌파연극인들에겐 큰 위협이 됐고 따라서 그들의 방해는 대단했었다.
이들은 불량배들을 내세워 극장입구를 봉쇄, 관객들을 몰아냈으며 출연자들에게도 공갈협박을 하였다. 그러나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 속에 경찰력은 이들을 몰아낼만큼 그 힘이 강하지 못했다.
견디다못한 유선생이 이철승씨에게 보호를 요청하게 됐고 이씨는 학련의 힘으로 「극협」을 보호, 무사히 공연을 마칠수 있게 됐던 것이다.
김동원과 나는 동경 학생좌시절부터 무대서 함께 살아온 단짝 친구였으나 이 『자명고』 공연이야말로 그뒤 연극계에서 김동원-이해랑 「콤비」의 실질적인 출발점이 됐었다.
그때부터 김씨와 나는 많은 연극에서 주연과 그 상대역으로 출연하면서 호흡을 같이 해봤고 지금까지도 우리 두 사람은 몸은 제각각이지만 마음은 늘 같이하고 있는 사이다.
얼마나 단짝이었는가 하면 지금도 가끔 우리가 일선에서 활약하던 시절의 「팬」을 만나면 김동원을 「이동원」, 이해랑을 「김해랑」으로 착각하는 예가 가끔 있다.
이름 얘기가 나왔으니 밝혀야 할 것이있다. 나의 본명은 이해랑이가 아닌 이해량으로 가까운 몇몇 친구와 가족만이 알고있다.
끝자인 「양」자가 「랑」으로 바뀐 것은 동경학생좌 시절부터다. 가운데 자인 바다「해」자가 물수변( )이 있어 조화를 주기 위해 끝자에도 물수변을 붙인 것이 예명 아닌 본명이 되고 말았다.
호적에만 본명으로 기록되어 있을뿐 모든 등록명의는 모두 이해랑으로 되어있으며 심지어 국회의원시절까지도 바뀐 이름으로 통용되었었다. 여기서 잠시 유선생의 집필방법을 소개할까 한다. 모든 일에 빈틈이 없는 유선생은 집필 과정도 수학공식처럼 치밀했다. 대형「그래프」지를 서재에 붙여두고 등장인물의 교류·성격·마찰·얘기의 흐름등을 마치 설계도의 단면도를 그리듯 도해표시를 해놓고 「펜」을 잡았다.
이 방법은 오늘날 젊은 극작가들에게도 참고가 될 것 같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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