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한국극지제한대」 설상장정 800km|구사일생의 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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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진대가 북위 80도선에서 지냈던 9월7일밤 영하 40도에 육박하는 혹한은 정말 대단했다. 입가에는 숨쉴때 나온 습기가 얼어붙어 고드름이 달렸고 숨을 깊이 들이 마시기라도하면 머릿속이 찡하고 빠개지는듯한 아픔이 이마에 와 닿았다. 눈 가장자리의 물기가 얼어 피부가 찢어지고 「카메라」를 얼굴 가까이 대면 쩍쩍 늘어 붙는 것은 물론 내한처리가 안된 「카메라」는 아예 작동조차 하지 않았다.

<카메라 만지다 살점 뜯겨>
「필름」이 부러지는 것은 예사였고 갈아 끼우기 위해 맨손으로 「카메라」를 만지면 손가락이 늘어붙어 살점을 뜯기기도 했다.
8일하오 3시, 진출할때 혼이났던 「크리배스」지역을 조심스럽게 들어섰으나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초속 20m의 바람이 눈보라를 몰곤와 시야가 막혀버리고 말았다.
기온은 영하30도. 두터운 우주복위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방풍읏을 입고서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는 몸을 으스스 떨게 만든다.
언몸을 녹이려고 눈보라 속을 헤치며 썰매를 잡고 뛰어보기도 하지만 숨만 찰뿐이고 체온은 오르지 않는다. 순식간에 기온은 더 내려가 35도를 가리킨다. 눈썹과 수염에는 얼음이 붙고 「에스키모」는 정신없이 개를 몰아댄다.
전날의 「캠프」지에서 12km를 더 나아가 「베이스·캠프」에서 53km 떨어진 곳에 막영올 설치했다. 「텐트」의 줄을 단단히 붙들어 메고 들어 앉았으나 강한 바람에 펄럭이는 「텐트」는 금방이라도 날아갈듯하다 잘 피워진 「버너」에 몸을 녹이며 교신을 시도했으나 기상악화 때문인지 「카낙」 「베이스·캠프」 모두 불통이었다.
9일아침 일어나보니 「텐트」와 개썰매 주변은 바람에 날린 눈이 작은 산을 이룬둣 높이 쌓였다. 눈보라를 뒤집어 쓴 개들은 깊숙이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교신을 위해 많은 애를 썼으나 허사로 끝나고 급기야는 무전기가 추위에 얼어터지고 말았다.
하오3시30분 「베이스·캠프」를 20km 남겨놓은 지점에서 지원나온 이상윤·전명찬 두대원을 만나 말도 주고 받기전에 서로 얼싸 안았다. 이들이 가져온 뜨거운 한잔의 차는 지난 며칠간의 고통을 싹 가시게 해주는 것 같았다.

<밤새 날린 눈 작은산 이뤄>
전진대가 목표지점을 돌아 무사히 「베이스·캠프」로 귀환함으로써 남은 길은 빙하 하단부까지 2백m10km. 구간마다 표지기를 꽂아 두기는 했으나 짙은 안개와 눈보라가 휩쓰는 빙원에서 표지기 하나를 찾는다는 것은 바다에 빠진 바늘을 건지는 일이나 다름 없었다. 10일상오10시 귀로에 올랐으나 하오2시까지 겨우 표지기 4개를 찾았다.
20m 옆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아 11대의 썰매를 옆으로 벌여 세우고 전진했다. 자신있게 표지기를 찾아내겠다고 「스노·모빌」을 몰던 「에스키모」 「아튼」도 조용히 썰매뒤를 따른다. 대원들도 지치고 썰매를 끄는 개들도 연일 계속된 강행군으로 힘을 잃었다. 「시오라팔루크」에서 온 「마생왁」의 개 한 마리가 발바닥이 갈라지고 허약해져 더 이상 썰매를 끌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줄에서 떼어놓자 그대로 뒤처져 실연속으로 사라진다. 극지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죽음을 몰아오는 듯한 강풍과 눈보라, 감각을 잃어버릴 정도의 혹한, 절망의 구렁으로 빠져드는듯한 짙은 안개는 「그린란드」의 내륙빙하, 「아이스·캡」의 대표적인 장관이자 가장 위협적인 악마의 세계이기도 했다.
철수첫날 12시간을 쉬지않고 달려 1백km를 주파했다. 밤12시가 넘어 막영지에 도착, 「카낙」과의 연락을 위해 하나남은 통신기를 열었으나 이마저 추위로 고장나고 말았다. 개 식량도 거의 바닥났고 대원들의 식량도 「캠프」마다 비축해 놓은 것을 찾지 못한다면 곧 동이 날만이다.
남은길이란 한시라도 빨리 이 죽음의 지대를 벗어나는 방법뿐이다.
개나 사람이 지쳐 쓰러지기 전에 최소한 빙하지대를 벗어나야 한다.

<삽시간에 덮친 눈보라>
11일. 기온은 영하 20도쯤으로 온화해졌고 안개도 차차 걷히고 있었다.하으5시픔 눈여겨 보아두었던「글레처」 옆 산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인다. 대원들의 입에서는 이제 살았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홀러 나왔다. 이때 갑자기 지금까지 불어온 것보다 훨씬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저게 「블리자드」구나 느낄 사이도 없이 빙원위의 모든 것을 쓸어 내리는듯이 온천지를 뒤흔들며 몰아치는 바람은 태양마저 가려 회색의 대륙을 만들었다.
개가 썰매를 끄는것이 아니라 개와 썰매가 함께 날아가는 것 같았다. 썰매 위에서도 양손으로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고 있지 않으면 바람에 날려갈 것 같아 바짝 웅크리고 앉아 그저 앞만 바라본채 빙하가 갈라진 틈이 많은곳을 벗어났다.
빙하 하단부는 올라올때보다 더욱 울퉁불퉁해진, 경사가 급한 푸른 얼음으로 변해 있었다. 2∼3m 높이의 빙구 (빙구)가 마구 솟아있는 미끄러운 내리막을 개썰매가 어떻게 내려가나, 대원들은 걱정반 호기심반으로 궁금해 했으나 「에스키코」들은 언제 준비했는지 쇠사슬과 「나일론」끈을 여러벌 등그렇게 엮어 썰매 밑바닥에 걸었다. 속력을 내던 썰매들이 직직 소리를 내며 「브레이크」가 걸렸다.
경사가 더욱 급해지자 무게때문에 가속도를 이기지 못한 썰매가 뒤집어지고 데굴데굴 구르다가는 처박혀 대원들이 다치고 상자가 쏟아져 내렸다.

<빙구선 모두가 곤두박질>
악전고투하기 6시간, 12일하오9시쯤 「모레인」지대의 바위산이 떨어져 가는 해를 받아 붉은 미소를 띠며 우리를 맞아준다. 「글레처」는 용케 빠져나왔지만 바위투성이 산길만은 쉽게 비켜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아직도 저 지긋지긋한 악마같은 길이 남았구나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빠진다. 『지금보다 몇배나 많은 짐을 갖고도 너를 이겨냈는데 이까짓 2t쯤이야 당장 결판을 내리라!』하는 각오로 전대원과 「에스키모」가 짐을 나눠지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는 들산을 넘고 또 넘었다.
「아이스·캡」위에서의 고역에 비하면 발밑이 푹신푹신한 「카핏」처럼 느껴졌던 「툰드라」의 늪과 물결이 출렁이는 해안가 부드럽던 막영지를 꿈꾸면서….
글 홍성호 기자 사진 김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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