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소리」<제60화>|남기고싶은 이야기들<저자 황재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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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방의 감격이 채 사라지기도전에 전국을 둘러싸고 큰 정치적 혼란이 빚어졌다. 모두 저마다 우국지사요, 애국자임을 자처하는 가운데 수백개의 정당이 쏟아져 모래알처럼 따로따로 노는판이었다.
정치에는 문외한인 나같은 목사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그저 장로교총회의 교육목사로서 묵묵히 일했다. 그러던중 47년8월 영국 「버밍검」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연합회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게됐다. 그동안 내가 건국의 주일학교를 순방하면서 지도자 양성에 힘써왔기 때문에 대표로 선발된 것이다. 47년7월23일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는 미국 「노스웨스트」 항공(NWA)의 여객기에 탑승했다.
이날은 마침 NWA기가 우리나라에 첫 취항하여 떠나던 날이기도했다. 나는 문장욱박사와 김룡중씨와 동생이되어 여의도를 떠난지 3시간반쯤 뒤에 동경에 도착했고 비행기를 갈아타고 「뉴욕」으로 갔다.
문박사는 나보다 세살위로 충남당진 출신이다. 연전 문과를 나와 일찌기 미국 「콜럼비아」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귀국후 감리교 신학교에서 교수를 지냈다.
문박사는 46년 남조선과도정부에서 외무처장을 맡았고 문화사절단장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길이었다. 그는 건국직후인 48년8월부터 10월까지 초대 문교부 차관자리를 맡았다가 49년 도미하여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출강하다가 몇해전에 은퇴했다. 그리고 김룡중씨는「워싱턴」에 거주하는 교포다. 내 평생 처음으로 외국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나는 「코리아」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한복바지·저고리에 모시 두루마기까지 입었다. 「뉴욕」에 도착하니 눈이 빙빙 돌 지경이었으나 아랫배에 힘을 두둑히 넣고 애써 태연해 했다.
수중에 미국돈이 한푼도 없어 김룡중씨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밴더빌트·호텔」에 투숙하니 웬 촌사람이 왔나하고 모두들 힐끔거렸다. 어떤 사람이 두루마기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오랜 그뒤 미국생활에서 새삼 느낀 것이지만 미국사람들 만큼 호기심이 많은 사람도 드물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웃으면서 인사하고 말을 건넨다.
내가 「코리아」를 이해시키는데는 상당히 긴 설명이 필요했고 그 사람은 내가 영어로 말하는 것에 더욱 놀라는듯했다. 나중에 들으니까 함석혜옹이 두루마기 차림으로 세계를 순방하면서 설교의 말씀을 했다고 하는데 두루마기 외유는 내가 먼저 인성싶다. 「뉴욕」에서 닷새동안 머무르며 여러군데를 구경한뒤 세계주일학교 연합회에서 여비를 변통하여 영국으로 떠났다. 내가 탄 여객선은 「퀸·엘리자베드」호로서 승객 3천7백여명이 함께 탄 어마어마하게 크고 호사로운 배였다.
하옇든 나에게 배당된 2등 선실에 짐을 풀었다. 눈빛보다 더 희다 싶은 「시트」에 싸인 침대하며 선실내 시실설 일류 「호텔」을 그대로 옮겨 놓은것 같았다.
일본에서 공부하여 외국문물을 조금 안다하던 나는 「뉴욕」에서 반쯤 촌사람이 된데다가「퀸·엘리자베드」호에서는 완전히 우물안 개구리였음을 깨달았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노라니까 고수머리에 얼굴빛이 시꺼먼 젊은이가 들어섰다. 정확히 얘기하면 시꺼먼 사람이 아니라 시궁창에서 방금 나온듯한 푸르죽죽한 검은 색깔의 피부였다나는 깜짝놀라 어느나라에서 온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피지」섬 대표로 세계주일학교연합회 총회에 참석하러가는 길이며 이름은「투일로븐」이라고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그때까지 「피지」섬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물거리다가 슬그머니 선실을 나와 「퀸·엘리자베드」호의 도서실을 찾아갔다. 대영 백과사전을 찾아보니「피지」섬은 태평양에 있는데 원주민은 식인종이라고 적혀 있는것이 아닌가.
『어이쿠, 이젠 죽었구나. 식인종에게 잡혀 먹히다니』-나는 겁이 더럭났다. 그런데 식인종이라는 그 청년이 예수교에서 주관하는 주일학교 총회에 대표로 참석하다니 이상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용기를 내 선실로 돌아와 그 청년과 얘기를 나눠 보았다.
「피지」는 인구가 25만명쯤 되는데 모두 기독교도라는 설명이었다. 식인종이 어떻게 예수를 믿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면서 옛날 원주민중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시커먼 얼굴속에 드러난 유독 흰빛깔의 이빨은 섬뜩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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