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잔혹극 오늘을 비추는 듯"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5면

"셰익스피어는 현장에서 작업한 사람이에요. 무대 위 배우들의 움직임과 대사를 직접 지켜보면서 공연 시간도 꼼꼼히 점검하고…. 하여튼 재기발랄한 작가였죠. 그래선지 그의 작품은 영 지루하지가 않아요. 더구나 요놈은 내가 몇년 전부터 무대에 올리려고 점찍어둬선지 더 애정이 가네요."

국립극단 예술감독 김철리(50)씨가 말한 '요놈'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인 '로미오와 줄리엣'도, '리어왕'도, '오셀로'도 아니다.

연극에 문외한이라면 "셰익스피어가 이런 것도 썼나"라고 갸우뚱할 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 바로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다.

'타이터스…'는 로마시대의 퇴폐적인 궁정을 배경으로 한다. 셰익스피어가 신참내기 작가 시절에 쓴 희곡으로, 그의 유일한 잔혹극이기도 하다.'리처드 3세''말괄량이 길들이기''한여름 밤의 꿈' 등을 통해 셰익스피어극 연출에 도통한 그가 이 '마이너'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힘이 넘치는 극을 해보고 싶었어요.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극중 가족 갈등.인종 차별.계급 문제 등으로 빚어지는 비극은 오늘날과 다를 바가 없으니 그점도 매력적이고요."

이 작품에는 14번의 살인과 강간.생매장.식인(食人).사지절단 등 말만 들어도 섬뜩한 행위들이 나온다. 하지만 김감독은 "원전을 훼손하지 않되 현대적인 걸 보여주겠다"는 생각에 너무 잔혹해 보이는 장면은 과감히 상징으로 대체했다.

한 여자가 강간당하는 장면보다 아이들에게 조롱당하는 장면이 더 잔혹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의상 또한 로마시대의 치렁치렁한 옷을 버리고 요즘 양복으로 갈아 입었다.

'타이터스…'는 그가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맡은 지 1년반 만에 직접 연출하는 첫 작품이다. 그래선지 연습실에서 배우들의 동선을 일일이 체크하고 대사를 수정할 때 그의 눈빛은 날카롭고 예민하다.

배우들에게도 연습 전에 대사를 몽땅 외워 오라고 주문했다.(대개 배우들은 같이 연습을 하면서 자연스레 대사를 외게 된다). "대사를 충분히 숙지해야만 실제로 연기를 할 때 감정이 묻어난다"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연극 연출가 외에도 배우.뮤지컬 연출가.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작품도 그가 번역을 맡았다.

"처음엔 밥 먹기 위해 번역을 시작했죠. 그런데 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아요. 우리말의 어미 하나, 토씨 하나에 따라 극의 느낌이 많이 달라져요. 번역을 하다 보면 극의 방향과 그림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도 장점이고요."

로마시대의 이야기, 한편으론 역사를 통틀어 보편적일 수 있는 이야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표현하려는 욕심에 그는 "골 아프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연신 뿜어대는 담배 연기 사이로 보이는 그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연출에만 집중한 작품은 평생 두 개뿐이었다"는 그에게 이번 작품 또한 오직 연출에만 집중하는 맛을 톡톡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지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