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클린턴 표정 … 오바마의 사전 각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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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009년 8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했다. 그해 3월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여기자 유나 리와 로라 링을 석방시켜 달라는 교섭을 하기 위해서였다. 두 여기자는 풀려났다. 그 뒤 클린턴 전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활짝 웃는 김 위원장 옆에 선 클린턴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10일(현지시간) 펴낸 회고록 『힘든 선택들(Hard Choices)』에서 “사안의 민감성을 감안해 ‘김정일과 사진 찍을 땐 웃거나 찡그리지 말라’는 행동지침을 빌에게 사전 브리핑했었다”고 공개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장관이 쓴 회고록에는 북한과 관련된 숨은 얘기들이 일부 담겨 있다. 당시 북한은 미국의 고위급 특사단이 방북하면 두 여기자를 풀어줄 수 있다는 의사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앨 고어 전 부통령,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특사로 거론됐다. 클린턴 전 장관은 “알고 보니 북한은 이미 남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며 “매우 놀라운 제안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미국 전직 대통령을 통해 국제적 관심을 끌고 싶었을 것”이라며 “남편은 1994년 김일성 사망 때 위로 편지를 보낸 일이 있는데 그때부터 (북한이)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백악관 일부 참모는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의 앙금 때문에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에 반대했다. 결국 클린턴 전 장관이 그해 7월 말 오바마 대통령과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이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오바마 대통령도 “우리에게 부여된 최고의 기회”라며 동의했다는 것이다.

 클린턴 전 장관은 “빌과 방북팀은 평양으로 출국하기 전 충분한 브리핑을 받았다”며 “빌은 나중에 ‘제임스 본드 영화의 오디션을 하는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고 전했다.

 2009년 2월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중단할 경우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는 물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파격적 제안을 했다. 이를 두고 클린턴 전 장관은 “향후 계속될 북한과의 게임에서 우세를 선점하기 위한 수였다”고 밝혔다. 특히 “북한의 후원자이자 평양 정권의 보호자인 중국을 국제적인 대북한 연합전선에 동참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북한은 한 달 뒤 여기자들을 억류하고, 그해 5월엔 2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클린턴 전 장관은 “미국이 악수를 청한 데 대해 북한이 주먹으로 응수했다”고 표현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중시 전략과 관련해선 “오바마 대통령이 인도네시아에서 유년기를 보내 아시아에 개인적 연계감을 느끼고 있다”고도 적었다. 또 2009년 2월 한국 방문 때 이화여대에서 받았던 ‘여성혐오적 지도자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질문을 소개하며 “다른 지도자들이 나를 대할 때 여자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대한다”며 “아직도 공공생활에서 여성들이 부당한 이중잣대를 적용받는 건 불행한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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