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전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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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대구의 약령시를 부활시키기로 했다고 한다. 속칭 「약전골」이라는 남성동 일대에 옛날의 영화가 과연 되살아나려는지.
약령시의 역사는 2백 90년 전으로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대구를 비롯하여 원주·공주 등에 법령에 의해 설치되었다. 그래서 「영」자가 붙은 것이다. 나중에 약령시는 청주·충주·진주에까지 개설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또 구한말까지 살아남은 것은 대구의 약령시뿐이었다.
당초에는 약령시는 지금의 대안동에 있던 객사자리에 있었다.
객사란 이조 역대 왕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었다. 건평도 2백평이나 됐지만 경내도 1천 평이 넘었다.
그게 지금 자리로 옮긴 것은 1908년 객사가 헐린 다음부터였다. 옛날의 약령시는 대단했다. 보통은 춘추로 두 차례씩, 춘시는 음력 2월 3일부터 13일까지, 추시는 음력 10월 3일부터 13일까지 열렸었다. 그게 나중에는 한 달간씩이나 늘어나는 게 보통이 되었다.
장만 열리면 으레 왕실 태의원에서 약재관이 나와서 궁중에서 쓸 약재를 제일먼저 골라갔다.
서울에도 비슷한 「약전골」은 있었다.
지금의 을지로 2가에서 3가 사이의 구리개와 종로 4가의 배우개가 바로 그것이다.
이 거리들은 언제나 약초냄새가 물씬거렸다.
한말에는 중국에까지 발을 넓힌 거상도 많았다.
그러나 이런 서울의 약재상들도 『자네 약령에 다녀왔나』하는 게 인사였다.
물론 대구의 약령시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번영하던 대구 약전골도 일제하에 차차 시들기 시작했다. 까닭은 간단했다.
옛날에는 약종상이라면 지방의 식자층에 속했다. 따라서 이들이 정기적으로 한곳에 모인다는 게 총독부로서는 달갑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약령시를 시들게 만든 것이다. 물론 양약의 보급이 한약의 수요를 상대적으로 감퇴시킨 것도 숨길 수 없다.
그래도 30년대까지만 해도 1백 50여개의 약재상들이 이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로 약령시의 부활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대구시 당국이다.
예전에도 약령시는 지방장관의 관리하에 있었으니 당연하다고 할까.
한약 「붐」이 다시 일고있는 세상이다. 서양에서도 한약은 재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어쩌면…? 하고 부픈 기대를 걸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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