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안 통하는 강남 사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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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의 B초등학교 6학년 자녀를 둔 김모(43)씨는 지난 4월부터 대치동 과학학원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고 있다. ‘전국 청소년 과학탐구 토론대회’ 준비 때문이다. 학원 도움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 건 4월부터지만 대회 준비는 지난 봄방학부터 시작했다. 세 명이 한 팀으로 참가하는 대회라 아이와 함께 할 팀원을 물색하고 전문 과학강사를 수배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4월초. 한국과학창의재단 홈페이지에 대회 주제가 발표되자 미리 섭외해놓은 학원 강사와 보고서 작성을 시작했다. 올해 초등부 주제는 ‘미세먼지’로, 보고서에는 ‘미세먼지가 발생하는 이유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고,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담아야 한다. 학원 강사와 함께 김씨가 관련 서적과 논문을 참고해 자료를 조사한 뒤 구체적인 세부 연구과제를 결정하고 이에 따른 실험 설계를 했다. 실험을 수행할 고가(高價)의 장비가 있는 대학 연구소에도 미리 도움을 청해뒀다. 김씨는 “아이 손에 맡겨서는 교내 대회를 통과하기 힘들기 때문에 내가 나선 것”이라며 “내가 극성이 아니라 참가하는 다른 팀 사정도 다 비슷하다”고 말했다.

강남 학부모들이 과학탐구 토론대회에 유독 관심을 쏟는 이유는 이 대회 수상 경력이 시도 교육청의 영재교육원 선발 가능성을 높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재교육원 수료가 과학고나 과학영재학교 진학에 유리하다고 판단하다보니 자녀의 자연계 진학을 염두에 둔 학부모일수록 이 대회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전문가가 끼다보니 대회 준비 비용이 만만치 않다. 김씨는 “지난해 교내 대회 1등한 팀을 이끈 엄마에게 물어보니 보고서 한편 완성하는 데 200만원이 들었다고 하더라”며 “실제 준비해보니, 더 들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강남 출신 수상실적 저조

많은 학부모들은 초등학생 보고서에 성인, 그것도 과학 분야 전문가가 달려들어 정성을 쏟으니 강남 출신 학생들의 수상 실적이 당연히 좋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한국과학창의재단에 따르면 2009~2013년 5년간 전국 대회에서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 초등학교에서 대상·금상·은상을 수상한 적은 한번도 없다. 동상 두 차례 받은 게 전부다. 중학교도 사정은 비슷하다. 2011년 신사중(강남구)이 은상을 받은 게 유일하다.

그렇다면 누가 상을 휩쓴 걸까. 대부분 중소 도시 학교 학생들이었다. 특히 경남지역 초등학교는 2010년(삼룡초)과 2011년(석동초) 연거푸 대상을 수상하는 등, 한해도 거르지 않고 동상 이내에 이름을 올렸다. 이런 상반된 결과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전문가들은 준비하는 과정을 꼽는다.

강남 아이들은 학부모끼리 팀을 짜고 학원 강사와 함께 보고서를 완성한 후 학교 교사는 나중에 이름만 올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중소도시는 처음부터 모든 게 교사 주도로 이뤄진다.

경남 충무초 공필재 교사는 “교사가 중심이 돼 아이들과 밤낮없이 실험한다”며 “학부모는 가끔 학교에 들러 ‘수고한다’며 간식을 넣어주는 정도”라고 말했다. 팀 구성도 당연히 담당 교사 재량이다. 학생 수가 많지 않아 평소 과학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을 눈여겨봐뒀다가 대회를 앞두고 의사를 물어봐 합류시킨다. 공 교사는 “과학 실력도 중요하지만, 협업을 할 수 있는 학생을 선발한다”고 설명했다. 4월 주제 공개 후 8월 전국대회까지 마치려면 최소한 4~5개월간 한 배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금당초(광주광역시)는 2009년에 대상을 받았다. 당시 학생을 지도했던 김용우 운천초(광주광역시) 교감은 “중·고 교사를 수시로 찾아가 대회 준비 방법을 배우고 대학 교수에게도 자문을 구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대회를 준비하는 5개월간 단계적으로 완성했다. 김 교감은 “작은 학교라 교내 대회랄 것도 없고 교사가 딱 한 팀을 꾸려 처음부터 끝까지 이끈다”며 “보고서도 처음엔 틀만 잡았다가 교육지원청대회, 시·도교육청 대회를 거치며 수정보완해 전국 대회를 앞두고야 제대로 완성했다”고 말했다.

정말 학교 교육만으로 해결 가능한 주제?

강남 엄마들은 학원 강사 등 전문가 도움을 청하는 이유로 어려운 대회 주제를 꼽는다. “초등학생들이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주제를 던져 주고 실험 보고서를 만들어 토론까지 하라고 하니, 어떻게 아이가 자기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김희백 서울대 과학교육과 교수 주장은 다르다. “학교 교육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주제”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대회가 처음 열린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출제된 주제는 모두 우리 일상 상황에서 발생하는 과학 관련 쟁점들”이라며 “과학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폭넓은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좋은 주제”라고 설명했다. 이효근 하나고 과학 교사도 “같은 주제라도 전문가 수준의 정교한 실험부터 초등학생 수준의 창의적 해결까지, 얼마든지 재구조화할 수 있다”며 “제시된 주제로 초등학교 눈높이에 맞춰 실험을 설계하면 된다”고 말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 허정회 선임연구원은 평가 기준에 대해 “전문가의 도움이나 고가의 장비를 동원한 화려한 실험보다는 학생 수준에서 도출 가능한 창의적 문제 해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상을 포함해 수상작이 해당 학년 수준에 맞게 작성돼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상작을 요청했으나 재단측은 물론 수상한 교사 역시 모두 공개는 거부했다.

"교내 대회 넘으려면 전문가 도움 필요"
알면서도 사교육 헛발질 계속할 수밖에

강남의 과열된 내부 경쟁

전문가와 대회 주최 측의 설명을 100% 받아들인다면 지금껏 강남 엄마들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며 대회를 준비한 게, 결과적으로 대회 방침과는 정반대였다는 얘기가 된다. 정보에 빠삭하다는 강남 엄마들이 정말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걸까. 학부모들은 “모르는 게 반, 알더라도 어쩔 수 없는 분위기 반”이라고 입을 모은다. “교내 대회를 통과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중소도시에서는 교내 대회에 1팀, 많아야 2~3개 팀이 경쟁하는 데 반해, 강남3구에서는 한 반에서만 너덧 팀이 출전한다. 경쟁만 치열한 게 아니다. 엄마들은 “학교 측이 전문가 수준으로 공 들인 보고서를 채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교내 대회의 관문을 넘으려면 전문가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학부모 이모(43·서초구)씨는 “일단 교내 대회에서 1등을 해 학교 대표로 뽑혀야 상급 대회 출전 자격을 얻는데, 의사나 교수 부모를 둔 아이들이 부모 도움으로 전문가 수준의 보고서를 만들어오니 다른 아이들은 사교육의 도움을 안 받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학교 교사의 열정 부족”을 탓하는 학부모도 많다. 6학년 자녀를 둔 박모(40·강남구)씨는 “아이가 과학자를 꿈꾸고 있어 4학년 때부터 담임교사는 물론 교장·교감 선생님에게까지 대회 참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알아서 하라’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했다. 결국 올해 팀 꾸리는 것부터 실험까지 박씨가 직접 나서서 전문가 도움을 받아 보고서를 완성했다. 박씨는 “완성한 보고서를 학교에 들고가자 ‘지도교사’란에 사인만 해주더라”며 “교육지원청 대회에서 결국 떨어졌지만, 만약 전국 대회에 입상했다면 그 교사는 아무 것도 안하고 지도교사 상까지 받는 거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박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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