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327)|함춘원시절(제59화)|병원장직 또 맡아&&첫번째 「인턴」 시무식은 58년 4월|봉급적은 교수들 이중직, 이석많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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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5년 가을 내가 함춘원에 재복귀했을 때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않은 대학병원은 어수선했다.
미제5공군으로부터 병원건물을 인수받아 본격적인 진료를 개시한 것은 54년 3월이었다.
정부의 서울환도후 서울대학병원이 함춘원에 돌아온 것은 53년9월이었지만 망당 시계탑 건물을 비롯한 병원건물을 미공군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대학병원은 현 대학병원관사에 임시진료소를 개설하는 수 밖에 없었다.
대학교수로서 함춘원에 재복귀하는 나의 감회는 해방후 함춘원 복귀와 약간 다르긴 했지만 고향에 다시 돌아온 안도와 포근함 바로 그것이었다.
한때 대학주변 일부에서 나에 대한 오해나 악명이 있었다는 얘기는 이미 한바 있다.
그러나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간에 l·4후퇴때 내가취한 행동은 의대와 병원의 인재·기재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한 조치임이 틀림없다. 또 실제로 그런 성과를 거뒀음은 자타가 인정한다.
한편 4년8개월 군복무동안 정신적 고통이 극심한 가운데 10여만명의 국군전상 장병을 치료했으니 국가에 이바지했다고 자부한다.
어떻든 함춘원에 되돌아온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물리치고 학생교육과 환자진료및 교실원의 연구지도와 논문지도등으로지 대학교수 본연의 자세에 들어갔다.
그런데 다시 대학병원장의 보직을 받았으니 나로선 두번째 병원장의 중책을 맡은 것이다.
1956년10월4일의 일이다.
『어제 뜻밖에도 다시 병원장의 중임을 맡아달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본래 비재박식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때문에 수차 고사했으나 청허되지않아 부득이 이 자리에 앉게 되었읍니다.(중략) 어느정도 정비는 되었으나 아직 예산부족과 인원부비등 여러가지 애로는 우리의 앞길을 막연하게 흐려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역경도 이기고, 난관도 뚫고 나아갈 각오와 의지를 가지고 서울대학병원 재건의 지장목표를 향해 총진군해야겠읍니다. (후략) 』
이렇게 병원장 취임사를 하고 난 나에게 안겨진 과제는 숱하게 많았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대학병원의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서울대학교 안에서 가장 운영이 잘 안되고 안팎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대학병원이었지만 그런 데는 이유가 있었다.
비교적 운영이 갈 되었던 일제말기 대학병원의 1년간 예산액은 1백만원이었다. 57년 당시 물가지수로 마지면 약 10억원에 해당된다. 그런데도 예산은 겨우 2억4천만권으로 책정되었을 뿐이었다. 당시 어려웠던 국가재경을 고려해서 7억원을 요청했는데 문교부와 재무부에서 몽땅 깎아버린 것이다.
원래 서울대의대부속병원은 예산편제상 대학본부나 의대와 별도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예산을 얻어내기 위해 나는 재무부 예산국장실에 자주 드나들었다. 관리들은 막무가내였다. 나라 살림이 어려운데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관청이라면 부족하나마 예산한도 안에서 일하면 될지 모르나 환자를 상대하는 병원에서는 그럴 수 없지 않은가.
예컨대 엄동설한에 입원환자를 받고서 예산없다고 병실을 냉방으로 만들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대학병원의 독립경영을 허락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했다. 그러나 그것도 허사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당시 서울대학교와 계약된「ICA·미네소타」 교육원조 계획에 매달렸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히 하기로 한다.
또 하나 큰 문제는 의사들의 출·퇴근에 관한 것이었다.
대학병원에 가봐야 도대체 의사를 볼 수 없고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는 비난이 심했는데,v이는 봉급이 적은·대학병원의 임상교수들이 야간개업을 하느라고 병원을 비우는 예가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교수들의 이중직이 문젯거리였는데 그 당시어려웠던 시절엔 오죽했겠는가 짐작이 가리라.
나는 여러차례 문교부와 재무부에 특진제의 실시와 수당지급을 요청했으나 역시 허사였다. 교수들의 자숙과 희생정신을 요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때 사회적으로 큰물의를 일으켰던 「인턴」 「레지던트」제도를 함춘원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것은 나의 두번째 대학병원장 시절에 빼놓을 수없은 기록이다.
첫번째 「인턴」 시무식은 58년4월19일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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