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5) 제59화 함춘원시절 김동익(26)|성업의 「김내과」문닫고 경의전 강단에|유방현·고광도는 지금도 교수직지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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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감격의 8·15가 왔다. 1910년 치욕적인 한일합방 이후 36년 동안 잔학한 일제의 압박과 착취에 시달려오던 우리겨레의 기쁨을 나의 짧은 단설로 어찌다 표현할 수 있을까.
나 개인적인 기쁨 또한 더 할수 없이 컸다.
나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여러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나의 소원은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개업으로 더 이상 나를 소모시킬 수 없었다.
어차피 대학도 개편의 진통을 겪어야 했다. 물러나는 일인들의 교수자리를 메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대학뿐만이 아니었다. 정계·재계·문화계 전반에 걸쳐 개편작업이 진행됐다.
나에게도 숱한 유혹의 손길이 뻗쳐왔다. 정당에 가입하라는 것이었다. 정치활동을 같이 하자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관계의 그럴듯한 자리를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소신에 변함이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는 의사들의 모임인 건국의사회(45년 8월17일 결성) 조차도 참여하지 않았다.
오로지 대학 복귀를 위해 나 자신을 준비했다.
드디어 나의 꿈이 실현되는 날이 왔다. 1945년10월의 일이다. 경성의학 전문학교가 새로운 교수진을 구성, 창설됐는데 나는 내과교수로 발탁된 것이다.
이 학교는 얼마 후에 서울의과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로써 1935년 대학병원「이와이」 내과에서 개업가로 나선지 10년만에 그리던 함춘원으로 복귀한 것이다.
김내과의원이 대성창리에 날로 번창했지만 대학교수의 꿈이 실현된 것을 계기로 완전히 정리했다. 미련없이 폐업을 단행했다.
그리고 교수로서 교육·연구·진료에 나머지 내 인생을 바치기로 굳게 다짐했다.
이러한 용단은 전에 이야기한바 있는 10년전 「세브란스」교수취임 좌절때의 결심이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일인에게 물려받은 대학을 정리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면서 진한 애로와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따로 하기로 하고 당시 새롭게 구성된 경의전 교수진을 소개할까 한다.
교장 심호섭, 병원장 백인제, 교무과장 이종윤, 제1내과 심호섭, 제2내과 김동탄, 제1외과백인제, 제2외과 이재복, 정형외과 김장성, 소아과 계선근, 안과 공병우, 산부인과 윤태권, 이비인후과 박영돈, 피부비뇨기과 오원석, 「엑스·레이」 조중삼, 해부학교실 정일천, 생리학교실 이종윤, 병리학교실 신성우, 세균학교실 기용숙, 위생학교실 심상황, 생화학교실 이기령.
내과 교실은 2개가 있었는데 일제때 교수 이름을 따서 「이와이」내과니 「이또오」내과니 불렀던 것을 고쳐서 제1내과, 제2내과로 부르기로 했다. 이것은 외과도 마찬가지였다. 강의에 쓰는 학술용어도 독일어에서 영어로 바꾸어 사용하기로 했다.
당시 교수진 18명 가운데 3명이 경의전 24년 졸업, 나의 동기동창생이라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또 하나는 나로선 처음으로 격식을 갖춘 제자가 생겼다는 점이다.
경의전 내과교수로 취임하기로 약정하고 아직 강의를 시작하기전의 일이다.
해방된 바로 그해에 경의전을 졸업한 유방현·고광도·김진조등 세청년들이 찾아와 내 밑에서 내과학을 연구하고 싶다면서 내과 교실원으로 받아달라는 것이었다.
나에게 강의를 들은 일이 없는데도 사제의 의를 맺고 싶다는 그들의 태도가 워낙 진지해서 쾌히 승낙했다.
김진조씨는 한학에 능통하고 문필이 뛰어난데다 두뇌가 좋아 기대를 걸었는데 6·25때 군에 입대한 후 가정사정이 여의치 않아 대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부산시 동구좌천동에서 내과의원을 개업중이다.
유방현박사는 열심히 연구생활을 거쳐 부산의대학장·대한내과 학회장·대한소화기 병학회장등을 역임하는등 눈부신 활약을 했다. 우리나라 내과학계에 끼친 공로도커 그가 자랑스럽다.
유박사는 현재 부산대의대 내과교수로 후학양성에 여념이 없다.
고광도박사는 지금까지 대학에서 맹활약 중이다. 대한소화기 병학회장을 지냈고 현재 고대의대 내과교수로서 교육과 진료에 열중하고 있다.
다만 이들 두 교수의 박사학위논문심사에 내가 직접 관여하지 못한 점이 내내 미안하고 섭섭한 마음 금할 길 없다. 두 교수의 학위논문 통과때 나는 공교롭게도 의대와 병원을 위해 군복무중에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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