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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깐죽거리 잔혹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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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습관은 이런 것이다. 글을 쓸 때도 시작은 캐스팅이다. 방송에서 그 사람을 쓰려면 엄청난 수고와 출연료가 든다. 자판 위에선 무료다. 취소도 자유다. ‘칼럼캐스팅’은 부담이 없다. 명예훼손만 주의하면 된다. 오늘은 글로벌캐스팅.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한국의 개그맨 조윤호, 나머지는 이번 지방선거의 승자와 패자들이다.

 내일 출간 예정인 힐러리의 회고록 제목은 『힘든 선택들(Hard Choices)』이다. 후보 경선 당시 라이벌이었던 오바마가 국무장관 제의를 했을 때 심정이 어땠을까. 나를 누른 저 사람 밑에서 2인자 노릇? 결과적으론 플러스였다. 4년 동안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완수했고 그 성취로 미래에 대한 신뢰를 얻었다. 여기서 잠깐. 학창시절 반장선거에서는 2등 한 학생이 부반장을 하지 않았던가. 이번 선거에서 패한 상대방 후보를 과감하게 부시장, 부지사로 임명하는 건 어떤가. ‘힘든 선택’이겠지만 상대방도 ‘당황하지 않고’ 즐겁게 수락한다면 한편으로 신선하지 않을까.

 이제 개그맨 조윤호 차례다. 연결고리는 ‘당황하지 않고’라는 그가 퍼뜨린 유행어다. 코미디를 안 보는 시청자라면 요즘 TV광고에서 ‘빡’ ‘끝’ 두 글자를 외치는 검은 옷의 남자를 떠올리면 된다. 전지현, 이정재, 지드래곤 같은 특급스타들의 전유물인 이동통신사 모델이지만 개그콘서트의 ‘깐죽거리 잔혹사’에선 허세건달로 등장한다. 먼저 상대방에게 유단자냐고 점잖게 묻는다. 고수인 양 무술을 펼치지만 이긴 적은 한 번도 없다. 매력이 뭘까. 위험한 국면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계속 대든다. 일관성이 돋보인다. 고비마다 ‘끝’이라고 외치지만 아무도 그게 ‘끝’이라 믿는 시청자는 없다.

 이쯤 해서 선거판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번 선거엔 유난히 깐죽거림이 많았다. 친구타령과 가족이야기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음악이 유효할까. 나미가 불러 히트한 ‘영원한 친구’를 깔아보자. 가사에 ‘친구’가 나아갈 길이 적시돼 있다. “서로 다 같이 웃으면서 밝은 내일의 꿈을 키우며 살아요.”

 라디오에 출연해 조윤호는 달라진 가족들의 반응을 묻는 질문에 “미술학원을 하는 작은형이 한 번도 나를 그려준 적이 없는데 이번에 날 모델로 그려서 학원에 전시까지 했다”고 답했다. 세상사 이런 것이다. 경기는 끝났고 남은 건 쓰레기다. 마음속에 쓰레기를 담아두지 말자. 그림은 좀 시간이 걸리니까 친구끼리 사진이라도 몇 장 찍는 게 어떨까. 길게 보면 길이 보인다. 끝은 아직도 멀었다.

주철환 아주대 교수·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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