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고상함 NO 현장의 열기 YES 새로운 감동 OK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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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호 16면

여신동(37)은 요즘 가장 핫한 무대 디자이너다. 지난 1년간 무려 20여 편의 작품에 참여했고, 최근에만 동아연극상 무대미술기술상(2010), 한국뮤지컬대상 무대미술상(2011), 대한민국연극대상 무대예술상(2012)을 잇따라 수상했다. 스케일이 크거나 기술이 화려한 건 아니다. 뮤지컬 ‘빨래’ ‘모비딕’, 연극 ‘히스토리보이즈’ ‘나는 나의 아내다’ 등 오밀조밀 디테일이 넘치는 완결된 세계가 왠지 모르게 예술적으로 보이는 그의 무대는 극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관객의 가슴을 뛰게 한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막이 오르기도 전에 무대가 먼저 조근조근 얘기를 걸어온다.

실험극 연출가로 변신한 무대 디자이너 여신동

공연 스태프로 머물기엔 자기 색깔이 너무 짙어 보이던 이 남자, 결국 배경을 뚫고 나왔다. 지난해 19금 무언극 ‘사보이사우나’로 극장을 공중목욕탕으로 만들며 연출 데뷔를 했고, 이번엔 청소년극에 도전한다. ‘국립극단 청소년극 릴-레이’의 마지막 작품 ‘비행소년 KW4839(6월 13~21일. 백성희장민호극장)’를 위해 지금 한창 극장 안팎을 공항터미널과 비행기 내부로 꾸미는 중이다. 그가 ‘연출’하는 무대는 전통적인 의미의 연극은 아니다. 무대미술가의 작품답게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가 주도하는 무대다. 드라마도 메시지도 없지만 컨셉트는 있다. ‘오감을 일깨워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공간’이다. ‘전시가 되고 싶은 공연’ 혹은 ‘무대로 가고 싶은 미술’이랄까.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제껏 듣도 보도 못했던 무대라는 사실이다.

‘비행소년KW4839’ 무대 도면. 극장 전체가 비행기 기내면서 교실 내부가 된다.
‘비행소년KW4839’ 연출 일러스트.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 외부를 공항 출국장 검색대로 꾸민다.

극장 안에서 미술로 자기주장을 하는 예술가란 어떤 사람일까. 새로운 개념과 형식의 실험자라니 얼마나 날을 세우고 살까 싶지만, 여신동은 예민해 보이는 눈빛과 달리 구수한 경상도 억양의 나른한 말투가 퍽 정감 가는 사람이었다. 어렵고 진지한 얘기를 하면서도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는 오묘한 재주가 있었다. 배우처럼 제스처를 쓰고 귓속말하듯 속삭이기도 하며 낯선 실험의 비밀 보따리를 한 겹 한 겹 풀어갔다.

시작은 그냥 ‘만남’이었다. 지난해 3월 국립극단이 주최한 청소년 예술가 탐색전을 통해 17명의 청소년과 무작정 만났고, 무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에게 뭔가를 주려 애쓴 두 달 동안의 과정이 뭉쳐 공연이 됐단다. “애들이랑 세트를 만들 수도 없고 도면을 가르칠 수도 없고, 막연하더라고요. 배우 되고 싶다는 애도 있고 다양한 애들이 모였는데, 얘들한테 뭘 해줘야 되나 싶었어요. 5월에 뭔가 발표를 해야 하는데 발표는 뒷전으로 미루고 일단 서로 알아가기부터 시작했죠.”

매주 아이들을 만나며 글과 그림을 통해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만들어주니 아이들은 자신의 위치를 대략 두 가지로 표현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설렘을 품은 여행자, 그리고 끊임없는 검열. 미지의 공항에서 이륙해 청소년들의 현재를 찾아가는 ‘여행 체험’ 공연이라는 아이디어가 절로 나왔다. “두 달 동안 아이들이 자기 상태를 탐구하고 발표해온 과정을 돌아보니 그 결과 자체를 무대미술화할 수 있겠더라고요. 무대미술이란 게 단순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 친구들 자체를 무대미술화하자는 생각을 해본 거죠.”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란 제목의 작은 발표회는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올해 국립극단 청소년극 릴레이 ‘탐색과 도전’이라는 테마에 딱 맞는 실험으로 정식 공연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출연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배우들에게서 내면의 청소년을 끌어내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실제 청소년들이 하는 게 큰 의미가 있는데 배우를 활용해야 하는 것이 숙제였어요. 대본에 있는 캐릭터를 살리는 것이 배우란 직업인데, 없는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래서 연기나 화술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배우를 뽑았죠. 연기 경력이 없어도 새로운 것을 목말라 하고, 자기를 노출하는 데 거부감이 없는 사람들로요.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환상의 공간에서 청소년의 현재를 공감
관객은 단순한 구경꾼을 넘어 색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 티켓을 보여주고 들어와 객석에 얌전히 앉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서 여러 단계 검열을 거쳐야 하듯 ‘청소년의 현실’을 만나는 비행을 위해 각종 검열을 거친다. 일상에서 어른들에게 검열을 당해온 아이들이 역으로 어른을 검열해 자기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란다. 비행기에 오르면 검열을 진행하던 승무원들이 어느새 학생이 되어 책상 앞에 앉아 있고, 비행기이자 교실이기도 한 공간에서 배우와 관객은 하나로 섞인다. 비행기가 이륙하면 흡사 실제 같은 굉음과 진동이 재현되며 익숙한 안내방송이 흐르고, 아이들의 이야기가 전시처럼 펼쳐진다.

순간의 상황을 포착해 몸으로 표현한다니 행위예술이나 퍼포먼스와 비슷하지 않을까. 심지어 서사도 없다. 그저 비행기를 타고 만나는 환상의 공간에서 청소년의 현재를 공감각적으로 느끼는 여행이 시놉시스의 전부다. “미술 식으로 얘기하면 현실을 살고 있는 청소년들이라는 오브제를 비행기 안의 시공간이라는 컨셉트를 통해 나열하는 것이죠. 연출적으로 청소년을 최대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들을 다양하게 수집해서 비행기를 타는 과정 속에 배치해 봤어요. 하지만 극장이라는 임팩트 있는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반영한 사건을 통해 전개되는 연극적 형식이기 때문에 미술계의 작업과는 접근방식이 전혀 달라요.”

실험적인 무대가 청소년 관객에게 어렵지 않겠느냐 물으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공연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이들을 통해 자기를 비춰보는 공연이 될 거란다. “작년 워크숍 때도 어른들이 오히려 많이 느끼고 가는 것 같았어요. 청소년이라는 대명사가 관객의 거울이 된달까요. 대사도 아이들이 작년에 쓴 글을 바탕으로 한 건데, 아이들이 쓴 글이 더 철학적이에요. 무겁게 쓴 게 아니고 즉흥적으로 가볍게 썼는데 그런 게 어른들을 탁 건드리는 거죠. 애들이나 우리나 고민은 똑같아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인데, 다만 저들은 첫 두려움을 겪고 있을 뿐이죠. 살면서 처음 자기와 대면하는 순간에 스스로를 향한 질문들이 뭉쳐있다고 보고, 그 지점에 집중한 거예요. 자기에게 질문을 던지는 첫 순간이 예술적인 시선으로 바라봤을 때 굉장히 아름다운 순간인 것 같거든요.”

낯설고도 익숙한 공간 속에서 잠자던 감각을 일깨워 자아와 대면한다는 큰 흐름은 전작 ‘사보이사우나’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보이사우나’는 누구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목욕탕 풍경을 낯설게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을 무대미술로 표현했었다. 무대미술가라는 정체성 때문에 공간 자체에 천착하는 걸까.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자기를 긴밀하게 만나는 거예요. 예술가는 표현하는 사람이고, 표현한다는 건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자기를 거쳐서 뭔가를 생산하는 거잖아요. 자기를 잘 알아야 표현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은밀한 자기를 정확히 볼 수 있는 공간을 찾으려는 거죠. 그래야 다른 것까지 볼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연출할 땐 무대를 비우는 편이에요. 공간은 최소한으로 절제하고 다른 요소를 많이 보여주고 싶어서요.”

“텍스트 아닌 에너지로 감동 전합니다”
방황하는 청소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을 작품으로 만들고 있지만, 그 자신도 꽤나 고민과 방황이 많았던 인생이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들어가 졸업은 예고에서 했고, 미대에서 공예디자인을 전공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무대미술과에 다시 들어갔다. 전공을 살려 무대미술가로 맹활약하는 와중에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쉼 없이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던져온 그가 마침내 찾은 답이 연출가의 길인 걸까.

“연출가가 되려는 게 목표가 아니라 그냥 이것도 예술을 하기 위한 작업일 뿐이에요. 어릴 때부터 예술가로 남고 싶었거든요. 무대 디자이너는 제 직업이 됐고, 연출은 실험하고 공부하는 과정인 거죠. 공연이란 시스템에 가장 익숙해졌으니, 예술가로서 작업하는 방식이 극장을 통하게 된 것 아닐까요. 사실 개인적으론 무대작업을 진화시킨 것일 뿐인데 주위에선 공연의 형식을 갖고 하는 일이니 연출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듣도 보도 못한 낯선 형식을 실험하는 이유는 “공연의 힘을 알기 때문”이란다. 무대와 객석이 나눠져 있는데도 ‘울컥하거나 닭살이 돋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에너지야말로 공연의 힘인데, 어려운 텍스트로 무대와 객석을 더욱더 분리시키는 지금의 연극이 안타깝다는 얘기다. “무대 디자이너로서 참여한 연극들을 보면 너무 권위 있고 고상해요. 또 어렵고. 객석에서 저도 많이 자는데(웃음), 그건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만나기를 열망해요. 메시지의 감동이 아니라 에너지로 오는 감동의 순간이 연극의 힘이거든요. 메시지를 원하면 책을 보면 되는데 연극이 텍스트 전달에 그치는 게 답답하고, 그걸 무너뜨릴 방법을 찾고 있어요. 서로 만나는 것이 연극의 원형인데, 이해하는 사람만 봐야 한다면 예술이란 게 과연 그래야 하는 건가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사실 그의 실험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이다. ‘사보이사우나’ 때도 연극계 사람들은 서사가 없는 걸 못 견뎌 했단다. 뭔가 찾아내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반면 감각에 열려있는 음악이나 미술계 사람들은 열렬히 호응했다. 그는 관객들에게 어려운 메시지를 얻어 가겠다는 허영을 버리고 편하게 오감을 열고 와달라고 당부했다. 현장에서 만나는 에너지에 모든 걸 맡기란다. “피나 바우쉬 작품도 고상해서가 아니라 그 에너지 때문에 감동을 느끼잖아요. 그걸 느끼려면 오감이 다 전달돼야 하죠. 눈물을 흘릴 때 눈, 코, 귀, 입, 피부가 다 동원되지 않나요. 그런 공연을 찾기 위해 이렇게 부딪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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