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섭의 세상탐사] 경제 기적의 열쇠 잃어버린 한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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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호 31면

한국 경제는 지금 저성장의 터널로 깊이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올 들어 세계 경제가 회복 기미를 보이면서 한국 경제도 조금 나아지는 듯싶었지만 2분기 들어 수출과 내수가 동시에 둔화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앞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지난 20여 년간 성장률 추이를 보자. 아시아 금융위기 전 1990~97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은 7.5%였다. 한국이 ‘경제 기적’을 구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고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1998~2007년에는 성장률이 연평균 4.7%로 크게 둔화됐다. 세계 금융위기를 겪은 뒤 2008~2013년에는 평균 2.9%로 더 많이 떨어졌다.

경제성장률만 놓고 봤을 때 한국은 이제 선진국 수준이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은 중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로(早老) 현상이다. 선진국이 되기도 전에 성장률 둔화가 너무 빨리 나타났다.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을 이끌던 나라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IMF 구제금융 사상 가장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했다”던 한국 정부나 IMF 측의 요란하던 선전과 비교하면 실상이 너무 초라하다.

그러면 무엇이 저성장을 가져왔는가? 1차적 원인은 명백하다. 투자와 저축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경제 기적’의 가도를 달리던 1990~97년에는 투자가 연평균 14.4% 증가했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 1998~2007년에는 투자증가율이 연평균 5.0%로 급락했다. 2008~2013년에는 평균 4.1%다. 더 크게 떨어지지 않은 듯 보이지만 최근 수년간의 지표는 암울하다. 2011년에 2.5%였고 2012년에는 마이너스 0.1%였다. 2013년에 4.1%로 약간 회복했지만 지난 3년간 평균 투자증가율은 2.2%에 불과했다.

저축률도 암울하다. 한국의 저축률이 20~30%에 달하던 시절 많은 전문가가 미국의 과소비를 비판했다. 당시 미국의 저축률은 3~4%에 불과했고 어떤 때에는 마이너스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의 저축률이 3~4%에서 오간다. 미국보다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투자하지 않고 저축하지 않는 경제가 제대로 성장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동아시아 경제 기적’의 열쇠도 투자와 저축이었다. 60년대 초반에는 동아시아와 중남미의 투자율이 비슷했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투자율을 중남미의 두 배 가까이 끌어올리면서 경제 기적을 일궜다. 이제는 옛날이야기다. 한국은 지금 저투자·저저축 국가가 됐다. 경제 기적의 열쇠를 잃어버렸다.

왜 이렇게 됐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기업들이 과거처럼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한국 내에 만들어지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기보다는 돈을 빌려서라도 쓰고 싶은 곳에 쓰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할 수도 있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너무 빨리 진행돼 경제가 활력을 잃게 됐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일리 있는 얘기다. 그렇지만 더 근본적 원인은 한국이 현재 유지하고 있는 경제 시스템에 있는 것 같다. 97년 외환위기를 거친 뒤 한국은 영미 선진국 모델을 ‘글로벌 스탠더드’라며 받아들였다. 선진국 모델을 적용해 ‘구조조정’을 해야만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다는 이상한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선진국 모델은 저성장 모델이다. 선진국과 같은 경제구조를 만들면 저성장체제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이 당연한 이치를 간과한 채 그동안 우리는 선진국 따라하기에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선진국 진입에 실패했다.

가장 극명한 예는 기업 부채비율 정책이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당한 뒤 정부와 IMF는 과잉투자가 위기의 주범이라 규정했고 400% 수준에 있던 대기업들의 부채비율을 1년 반 만에 200% 밑으로 끌어내리는 정책을 썼다. 이 부문에서 한국은 괄목할 성과를 올렸다. 부채비율 200%를 초단기간에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상장기업들의 부채비율은 그 후 계속 낮아져 지금은 미국보다 낮은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

그러나 대체엔진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작용만 있었다. 소비를 진작시킨다면서 가계대출을 늘린 결과 가계부채가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투자의 주체는 기업이다. 기업이 투자를 해야 저성장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와 지방선거를 계기로 ‘국가 대개조’를 추진한다고 한다. 기업 투자를 늘리는 시스템 개혁도 이에 포함됐으면 한다. 기업을 그냥 독려한다고 투자가 늘지 않는다. 시스템으로 접근해야 한다. 경제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면 분배 갈등이나 다른 사회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뚝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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