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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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요즘은 잠자리에 누우면 무더위를 식혀주는 소리가 어디서 낭랑하게 들려온다. 귀뚜라미 소리다. 어지럽고 삭막한 도회지의 한구석에 그래도 귀뚜라미만은 자연의「리듬」과 자연의 숨소리를 잃지 않고 있다.
청려한 소리. 그것은 곤충의 역사와 함께 3억년을 두고 계속되어온 소리련만 낡은 악기의 따분한 소리가 아니다. 언제 들어도 영롱하고 맑기만 하다.
삐르·삐르·삐르르르….또르르르·또르·또르르…. 의음이 풍부한 우리말로도 그 미묘한 소리를 어떻게 가려낼 수가 없다. 곤충학자들의 관찰에 따르면 귀뚜라미 소리는 한가지가 아니다. 연인을 만날때와 적을 만날때는 그 소리도 각각이다.
연정을 읊는 소리는 역시「멜러디」와 「리듬」이 있다. 또한 부드럽다. 사뭇 음악적인 소리로 상봉의 마음(?)을 흔든다. 그러나 위험물이나 수상한 환경에 직면하면 삽시간에 그 소리는 소음으로 바뀐다. 음파가 대단히 빨라지고 단조롭다. 물론 그런 섬세한 차이를 우리의 귀로는 분간할 수 없다. 귀뚜라미들만의 세계에서 통하는 암호다.
이들은 두날개 죽지를 악기로 삼아 그런 소리를 낸다.
이 지상에는 약1천2백종의 귀뚜라미가 있다. 이들은 온대와 열대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10여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땅속에 알을 낳으며 8월에 접어들면 깨어 나오기 시작한다.
영국사람들은 이 곤충을 평화의「상징으로 기린다. 한겨울 벽난로가에서 귀뚜라미가 뛰어 다니면 무슨 길조로 안다. 생활의 벗인양 그들에게 먹이도 주며 아낀다.
―한밤중 빈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백발이 느는 것이 서글프구나/ 밖에는 비가 내리는데 산과일이 떨어지는 소리/ 귀뚜라미 소리마저 들려 오누나.
당나라 시객 왕유의『추야독좌』.
중국사람은 예부터 귀뚜라미끼리 싸움을 붙이는 풍습이 있다.「투실솔」이라고 한다. 기이한 취미이긴 하지만 귀뚜라미를 생활의 벗으로 여기는 심정은 동서가 마찬가지다.
8일은 입추. 이제 여름은 서서히 뒷걸음을 치고 가을의 발걸음이 한발짝씩 다가선다. 한여름의 피로와 땀을 식히며 귀뚜라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어디에도 견줄데 없는 우리생활의 즐거움이다.
자연의 맑고 깨끗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우리의 심신마저 청결해지는 것 같다. 여름의 그 길고 지루하고 더러운 소리들. 신선한 소리, 맑은 음률이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것은 그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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