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얼 담긴 황룡사 유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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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라벌에 묻힌 찬란한 신라 문화 유물 4백여 점이 또 다시 1천3백년만에 햇볕을 보았다.
신라 삼보 중의 하나인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 9층 목탑이 서 있던 자리에서 최근 발굴된 명문 청동 거울·청동합·백자호 등은 국보급 문화재일 뿐더러 당시 생활사와 고대 신앙 연구에 다시없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생활사 연구에 큰 자료>
경주 고적 발굴 조사단(단장 김동현)이 발굴한 이들 출토 유물의 대부분은 금동제 귀걸이·팔찌·가위·거울·방추차 등 여자 용품들로 탑 창건 왕인 신라 선덕여왕이 소중하게 지니던 유물로 추정돼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거대한 목탑의 중심 기둥 주춧돌(심초석) 밑에서 발굴된 2백여 점의 유물은 탑을 장엄하게 모시는 뜻만 아니라 고대 신앙상의 진단이라는 깊은 정성이 담겨져 있다. 특히 이 탑은 신라가 삼국 통일의 큰 소망을 기원해서 세운 탑이기 때문에 보통 탑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들 유물 중 30여자의 명문과 현무·주작·청룡·백호의 사신이 안쪽에 양각된 청동 거울 1점(지름 16.5㎝)은 일부 파손되긴 했으나 문양이 뚜렷하고 글자도 화학처리만 하면 쉽게 판독될 것 같아 더욱 주목을 끌고 있다.
청동합 2점은 굽이 붙은 반구형에 보주형 꼭지가 달린 뚜껑이 있고 크기는 높이 13㎝, 입지름 12㎝. 청동형 항아리 1점(높이 13㎝, 입 지름8㎝)은 동판 2장을 붙여 만든 짧은 목이 있는 대형 용기로 표면에 많은 영락이 달려 있는 일종의 의기.

<국보급 유물 많아>
청동제원 1조(높이 5∼6㎝, 입 지름 12.5∼14㎝)는 밑이 둥근 반구형 그릇으로 각각 크기가 다른 대·중·소의 3개가 포개져 있었다. 이 밖의 적심석 사이사이에서 출토된 중요 유물로는 표면이 연주 무늬로 장식돼 있는 청동제 팔찌 1점(지름 7.5㎝)과 색깔이 찬란한 옥제 곡옥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청동 방울·철제 가위·돌을 다듬어 만든 방추차 등 기타 유물 2백20여 점도 모두 신라 귀족들이 사용하던 생활 용품들이다.
적심석 유물에 앞서 목탑 심초석 밑에서 발굴된 l백50여 점의 유물 가운데도 국보급으로 평가된 백자호를 비롯한 훌륭한 유물들이 많았다.0
최순우 중앙 국립 박물관장이 7세기 전반 경의 백자로 감정한 백자호(높이 9.5㎝, 구경 4.2㎝)는 표면의 유약이 잘 처리됐고 뚜껑에는 보주형 꼭지가 달려 있으며 보존 상태도 아주 양호했다.

<목탑 속의 사리함도>
황룡사 목탑 창건 당시 안치했던 사리함과 사리 항아리·순금제 태환 귀걸이·글자가 새겨진 동판·곡옥·구슬 등의 유물들은 심초석 아래에서 발굴됐다. 이들 유물은 모두 황룡사 터 발굴 과정에서 무게 30t의 9층 석탑 심초석과 5t의 연좌석을 들어올리는 순간 강회로 다진 적심석 위에서 발견됐다.
청동 사리함(높이 15㎝, 가로·세로 20㎝) 안에는 뚜껑이 덮인 사리 항아리(높이 15㎝)가 들어 있고 그 주변에 길이 6.2㎝의 순금 귀걸이 1점, 팔각으로 다듬어진 곡옥 등이 있었으나 사리는 없었다. 목탑의 기초는 사람 머리 만한 크기의 맷돌을 강회로 다지고 그 위에 사리함을 안치한 후 높이 1∼1.5m의 큰 자연석을 심초석으로 놓은 형식이었다.

<탑지서 나온 귀걸이>
황룡사 9층 목탑이 창건된 것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4년인 서기 645년. 동양 최대의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은 높이가1백25자(68m)로 알려져 왔고 지난 64년 심초석과 연좌석 사이의 사리공에서 신라 경문왕 12년(872년)에 중수한 기록과 탑지가 도굴됐다가 회수 된 일이 있다.
김정기 문화재 연구소장은 목탑 심초석과 적심석 사이에 유물을 안치한 것은 신라적인 개성을 살린 전례 없는 새로운 사실이라고 밝혔다.
탑터에서 순금 귀걸이가 나온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지금까지 장례 의식용으로 알려져 온 귀걸이가 신라 귀족들이 당시 장신구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시사, 종래의 학설을 뒤바꿀 중요한 자료가 될지도 모른다. 【글 이은윤 기자 사진 김주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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