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전관예우의 숨겨진 비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안대희 총리 후보자 사퇴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아니다. 국민과 법조계다. 직접적으로는 전관(前官) 경력이 없는 청년 변호사들이다. 왜냐고? 지금 서초동 법조타운엔 “역시 전관 끗발이 최고”라는 말이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건 무서운 사법 불신이다. 그러나 판사들 반응을 보면 온도차가 심하다.

 “요즘 세상에 전관 출신이라고 해서 사건을 봐주는 판사들이 어디 있습니까. 다 변호사들이 지어낸 거짓말이죠.”(현직 부장판사)

 전관예우는 있는 걸까. 없는 걸까. 37세의 소장 변호사인 나승철 서울변호사회 회장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전관이란 이유로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확실히 줄었습니다. 하지만 전관의 영향력을 기대하는 수요가 없다면 어떻게 그 많은 수임료를 줄 수 있겠습니까. 전관예우가 법원 내부에서 외부로 옮겨가고 있는 거죠.”

 전관 변호사들은 거액의 수임료를 건네는 의뢰인들이 ‘영향력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까. 자신의 실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 편승하는 것인지 그 답은 전관들 스스로가 알 것이다.

 조금만 더 들어가 보자.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전관예우가 사라지고 있다지만 다른 유형의 전관예우는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의 설명이다.

 “법원에 있을 때 전관들에게 어느 정도 절차상 페이버(favor·호의)를 주긴 했습니다. 재판 결과가 달라지지 않더라도 의뢰인 앞에서 체면은 살리라고….”

 문제는 재판 절차와 결과를 분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재판의 요체는 절차다. 신(神)이 아닌 인간은 진실을 찾는 데 한계가 있다. 단지 절차를 제대로 거치면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추정할 뿐이다. 절차가 흐트러지면 결론도 오염된다는 것이 근대 소송법 정신이다. 30대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재판에서 추가 증거나 증인신청을 기각당한 뒤 의뢰인 표정을 보면 전관을 쓸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빛이 역력합니다. ‘절차쯤이야…’라는 판사들의 안일한 태도가 전관예우를 키우고 있는 겁니다.”

 전관예우는 오히려 내밀해지고 교묘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고교·대학 동창, 사법연수원 동기보다 같은 재판부에서 좌우 배석을 했던 이들의 관계가 훨씬 끈끈하다. 한 대형로펌은 전국 판사들의 과거 좌우 배석 DB를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이젠 전관예우를 넘어 ‘후관(後官)예우’까지 등장하고 있다. 현 정부 들어 퇴임 공직자가 로펌에서 일하다 다시 공직으로 유턴하는 사례가 늘면서 미리 보험을 드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법원 밖 상황을 당사자인 판사들이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면 더더욱 심각한 일이다. 권리 위에서 잠든 자가 보호받지 못하듯 ‘정당한 법 절차(due process of law)’ 위에서 잠든 판사는 용서받을 수 없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사법부의 정상에 있던 대법관들 이름이 전관예우 논란에 오르내리는 한 사법의 공정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퇴직 대법관에게 변호사 활동을 하지 말라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국가가 빌려준 자리에서 쌓은 전문 지식과 실력은 서민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수임료를 5000만원 받는다면 그중 4500만원은 ‘전관예우의 대가’라는 사실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대법관의 퇴직 후 삶이 법 냉소주의의 온상이 아니라 법치주의의 성역(聖域)이 될 수 있다.

 판사들에게도 당부하고 싶다. 오늘 법정 안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절차가 재판의 생명임을 기억해내야 한다. 정의의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절차의 순결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사법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우리 아이들이 살아야 할 한국 법치의 위기를 뜻한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