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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명상] 6. 참으로 자유로운 침묵-정은광 교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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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봄은 봄인데 봄 같지가 않다. 봄 같지 않은 봄을 옛 시인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다. 왜 그럴까? 북한의 핵, SK상사의 분식회계, 대북 송금을 둘러싼 특검 논란에 이어 터진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봄기운을 막고 있다.

언제쯤 우리는 분단의 벽을 넘어 하나가 될까. 한반도에서 전쟁 걱정 안하고 사는 날은 언제쯤일까? 기업의 부당 내부거래, 분식회계의 버릇은 언제쯤 고쳐질 것인가?

단골 메뉴처럼 된 이른바 춘투(春鬪)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지? 진정한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한 송이 매화에 담고 싶다.

봄을 노래하는 꽃 가운데 매화를 택한 것은 꽃의 향기와 열매의 유용(有用)함에 있다. 매화꽃처럼 향내나는 삶, 매실처럼 쓰임새 있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옛 글에 유실무실오동실(有實無實梧桐實)이요, 유사무사양유사(有絲無絲楊柳絲)라는 말이 있다. 오동나무 열매와 버드나무에서 나오는 실은 있으나 마나 하다는 것이다.

생각해볼 일이다. 만물 가운데 최령(最靈)한 인간이 있으나 마나한 오동나무 열매 취급을 받으면 되겠는가. 세상을 무대 삼아 주연을 맡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겠으나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주연에서 조연으로 떠밀려 점차 절망의 늪으로 떨어져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동안 살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물질의 풍요 속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지는 않았는지.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지은 죄는 얼마나 되는지.

"밖으로 나가지 마라. 쓸데없는 인연 짓지 마라." 처음 도문(道門)에 들어올 때 눈 맑은 스승님의 말씀이 깊이 가라앉은 앙금처럼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봄바람이 불어오는 날 그대의 마음을 관조하라. 나는 누구를 위해 살아 왔는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만일 투명하게 바라볼 수 없다면 올해 봄꿈은 헛된 농사를 시작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꿈을 꾸는 사람의 마음은 실제의 기쁨보다는 자유로운 마음을 찾아 떠나는 나그네처럼 한가로울 것이다. 풍요와 명예를 헌옷처럼 버린 사람은 본심을 지키는 일을 보석처럼 생각한다.

재산을 도둑맞을까 걱정할 일 없고 경계를 당하여 따로 수고로울 일이 없다. 그러나 마음을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조금은 허황한 꿈을 꾸며 살아간다.

최근에 13년간 경마장에서 마권(馬券)을 구입한 사람이 2억여원의 손해를 봤다며 한국마사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화제가 되고 있다.

재판의 결과는 지켜봐야겠으나 앞으로 복권 판매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사람도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 요즘 로또 복권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어느 주 1등에 당첨된 사람이 1백70억원을 받았다니 세상이 시끌벅적할 만도 하다. 1백70억원이 어디 적은 돈인가. 눈이 뒤집힐 만도 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갑자기 큰돈을 손에 쥐었다고 해서 인생이 역전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의 삶은 엄숙함 그 자체다. 돈으로 인생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침묵은 금이라 했다. 침묵은 말 이상으로 웅변적이며 최선의 대답이라 할 수 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기침을 하면서 새벽에 깨어나려고 하는가.

그것은 적막한 침묵이 새벽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벽 별처럼 그대의 존재가 세상에서 참으로 아름답기에 그 적막하고 자유로운 침묵의 꽃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 뜨락에서 흘러내린 싱싱한 생명의 물방울들이 안개 피어오른 강물에서 세상의 바다로 흘러가도록 하자. 한해를 준비하는 농부의 마음으로 참으로 아름다운 그대에게 한 송이 매화를 보내고 싶다.

정은광 충북 보은 원불교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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