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미국인 유단자 셋 동시 상대 기보 기록하는 정성에 감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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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당초 「보스턴」체류는 3일이었는데 막상 그곳 바둑협회 측과 「스케줄」을 짜보니 최소한 5일을 요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응할 수밖에 없었다.
비단 「보스턴」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그러했다. 당초 한달 예정이 38일로 연장된 것은 그 때문이다.
「매사추세츠」주 바둑협회의 기원에는 방이 셋으로 나누어져 있다. 큰방에는 9개의 바둑판이 있었으나 관전자가 많아 대체로 1대3으로 대국을 했었다. 바둑만 셋을 놓고 필자는 돌아가면서 두었다. 이쪽만을 두는 사이 저쪽사람이 생각하고 해서 나는 거의 「논스톱」으로 두어야했다. 처음으로 둔 사람은 2단인 「스키프」회장과 「보브」초단이었는데 모두 6점으로 대했으나 정치 수는 7, 8점 정도인 것 같았다. 귀국하는 길에 동경에서 조기연군을 만나보고 「보브」초단이 필자에게 분패했다는 편지가 있었다고 하니 몹시 분했던 모양이다.
필자가 미국에 와서 배운 것이 한가지 있었다. 이것은 다름 아니고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대국방법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들의 관습으로 보아 매우 불손한 방법이었지만 제한된 시간에 되도록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을 상대하려할 때는 이 방법이 효과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수, 즉 지도해주는 입장에서 볼때는 이 방법도 무방한 방법이지만 지도를 받는 하수 쪽에서 생각할 때는 우리들의 관념상 상수 쪽이 욕먹을 것으로 보이기가 쉽다. 『제가 상수라고, 제 아무리 상수라 해도 그래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상대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렇게 야유 받기 알맞은 방법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대국방법은 거의 안 써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전문 기사들은 이러한 지도방법에는 매우 서투르다고 해야할 것 같다.
필자 역시 처음에는 어리둥절했고 요령을 몰라 망설였으나 두어 감에 따라 요령이 생겼다. 하수들의 실력 순서에 따라 차례로 앉아 달라고 했다. 그래야 상수 쪽이 혼돈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의 바둑「팬」들은 이와 같은 동시대국을 많이 두어본 듯 매우 익숙한 것 같았다.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순서대로 앉은 다음 나름대로의 실력에 따라 먼저 놓고 지도 받기를 대기하고 있었다.
더우기 놀라운 사실은 반드시 기보에 기록해둔다는 사실이다. 「프로」기사에게 지도를 받는다는 것이 어려운 기회이므로 기록을 해 두었다가 두고두고 공부하고 감상하자는 뜻이겠지만 마치 전문기사들의 대국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니 지도해 주는 쪽도 함부로 속임수를 쓴다든지 엉터리 수를 들 수도 없고 하여 마치 필자가 오히려 심판대에 오른 듯한 기분이어서 자연 긴장이 되었다.
아무튼 좋은 습관이며 오히려 우리「팬」들이 본받아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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