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이산가족 1천50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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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6·25동란의 상감은 28년의 세월이 지나도 가족과 생이별한 이산가족들 가슴속에서 씻기지 않은 채 멍울 져 있다.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혹은 6·25동란 중 북한 공산 치하의 수백만 동포들은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남으로 탈출했다.
이른바 월남 피난민들-. 그들은 사랑하는 처자와 부모 형제들을 남겨놓고 고향을 등졌으나 남북 분단이 굳어지면서 헤어진 가족들을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도 없이 단장의 4반세기를 넘겼다.

<단장의 4반세기>
더구나 6·25동란 때 공산군이 후퇴하면서 북쪽으로 납치해간 정치가·학자·공무원 등 납북 인사들의 가족은 피랍자의 생사조차 확실히 모르고 있다. 정부가 추정한 납북자 수는 8만4천5백32명이고 그 가족은 40만여명, 그리고 이산가족 수는 납북을 합쳐 1천만명. 따라서 실로 1천50만명이나 되는 우리 민족이 친족과 헤어진 비극을 안고 있는 셈이다.
대한적십자사는 71년8월12일, 『금세기 인류의 상징적 비극』으로 불리는 이산가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이산가족 재회를 논의하기 위한 남북적십자 회담을 북적 측에 제의했다.
그해 9월20일 마침내 남북적십자사의 첫 예비 회담이 열린 것을 필두로 25차례의 예비 회담, 7차례의 본 회담, 25차례의 실무회의를 가졌다.
그러나 남북간의 심한 견해차와 특히 이산가족의 생사를 알아내고 재회를 주선하거나 성묘단을 교환하자는 한적 측의 합리적 제의에 비해 북적 측은 회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속셈 때문에 회담은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북적측은 드디어 지난 3월20일 열릴 예정이었던 제26차 남북적 실무회의를 돌연 거부, 남북적 회담은 다시 언제 열릴지 기약도 없다.
정부는 월남 이산가족 재회 문제뿐 아니라 납북 인사의 송환과 생사 확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간 꾸준히 노력해 왔으나 57년11월 북한측이 국적을 통해 납치 인사 중 생존자 3백37명의 명단을 전해준 것 외에는 아무 진전이 없었다.
북한이 납북 인사들에게 자행한 비인도적 처사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대부분 북으로 끌려가면서 비명 횡사했거나 그들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숙청되는 비운을 겪었다.
북한은 작년부터 납북 인사들을 집단으로 각종 정치 교육장으로 내보내 「인공 체제」를 신봉토록 세뇌했고, 소위 「성분이 나쁜 자」는 함북 아오지 탄광이나 양강도 벌목장 등 각종 노역장에 보내 강제 노동을 시켰다.
북한측이 한적에 보내온 납치 인사 명단에는 안재홍 (정치가)·백상규 (2대 민의원)씨 등 저명 인사도 있었으나 대부분 일반인이 잘 모르는 인사들이었다.
한적이 각 방면을 통해 확인한 결과 많은 저명 납치 인사들이 북으로의 강행군도 중 살해됐거나 50년대 후반에 행방 불명된 경우가 많았다.
소설가 이광수씨와 최규동씨 (전 서울대 총장)는 50년1월북으로 끌려가다 중병에 걸려 총살됐다.
조만식 선생, 김선묵 목사도 그 무렵 평양에서 후퇴를 서두르던 공산군에 의해 살해됐고 병에 걸려 인민군의 둥에 업혀가던 정인보씨 (역사학자)도 묘향산 근처에서 피살됐다.

<북에선 숙청·투옥>
시인 김억씨 (안서)는 56년까지 평화 통일 촉진 협의회 중앙 위원으로 있다가 58년 평북철산 지방의 협동 농장으로 이주 후 행방 불명됐다.
전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씨는 57년부터 용강 양로원에 수용, 감금됐으나 현재 생사 불명이고 정치가 안재홍씨는 56년까지 평화 통일 협의회 상무위원 및 집행위원으로 있었으나 65년3월1일 북괴는 방송을 통해 안씨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정치가 엄항섭씨 (전 한독당 선전 부장)는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다가 58년 조소앙씨 (전 한독당 부위원장)와 함께 국제 간첩죄로 몰려 엄씨는 자살했다는 소문이고 조씨는 구속된 뒤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백상규씨는 59년 평남 안주 협동 농장으로 옮긴 뒤 행방 불명이고 원세훈씨 (2대 민의원)도 59년 중경파로 몰려 국제 간첩죄로 투옥, 숙청됐다.
최린씨 (33인중 한사람)는 52년 평양의 죄수 수용소에 감금됐다가 56년까지 노환으로 앓고 난뒤 58년 초에 행방 불명됐고 조헌영씨 (제헌, 2대 민의원)는 평화 통일 촉진 협의회 집행 위원으로 있다가 62년 경락 연구소원 (한방 관계)이라는 직책을 가졌던 것은 확인됐으나 근무 소식은 알 수 없다.

<월남자 가족 수난>
이렇듯 납북 인사들은 대부분 불행한 말로를 겪었으며 가족 일부가 월남한 뒤 북쪽에 남아 있는 「월남자 가족」들도 가혹한 감시와 제약 속에 고생하고 있다.
월남 피난민인 김계숙씨 (73·서울대 명예 교수)는 『자유를 찾아 고향을 등진 이 심정은 죽음을 초월한 극한적 원한과 비애다』라고 말했다.
납북된 정인보씨의 네째 아들 정양모씨 (45·국립박물관학예관)는 『해마다 6·25를 맞을 때마다 쓰라린 기억이 되살아난다』며 『83세의 노모께서 요즘도 상자에 아버님의 바지·저고리를 곱게 간직하고 「아버님이 살아오시면 입혀드리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 가슴아프다』고 말했다.
이산가족들은 남북적 회담이 빨리 재개돼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이 만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김광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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