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6·3 50주년 회고와 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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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50년 전의 함성과 흥분을 자랑스럽게 기억하면서도 오늘과 내일을 더 걱정하는 패기 넘치는 70대들의 모임, 바로 한·일협정 반대 6·3 민주화운동 50주년기념학술회의의 모습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면 살아 숨 쉬는 민주주의와 흔들림 없는 민족의 정통성을 추구한 6·3운동의 과제는 아직도 지속될 수밖에 없는 국민적 대화의 주제임을 확인하는 무거운 자리였다.

 1960년대 중반 한·일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회담과 협정이 필요하다는 상황의 논리를 6·3운동의 참여자들도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6·3운동의 기폭제는 일제의 무도한 침략과 불법적 주권 찬탈에 대한 분명한 사과 없이 어찌 국교 정상화를 논할 수 있느냐는 분노와, 회담에 임하는 한국 측이 민족의 정통성을 위해 싸워온 독립운동세력이 아닌 군사정부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는 데 대한 아쉬움에서 비롯된 민족감정이었다. 6·3운동의 성공 여부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젊은이들의 민주주의와 민족 정통성에 대한 그렇듯 확고한 의사표시가 없었다면 한·일관계사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찌 되었겠는가.

 반세기가 지난 오늘 6·3의 기수들은 노년의 완숙한 지혜로 좋은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마감하는 일본과의 강화조약에서 전승국 반열로부터 제외되어 배상 요구자격을 원천봉쇄 당한 한국이 65년 일본과 체결한 청구권협정은 일제의 주권 찬탈과 식민통치를 청산하는 조약이 될 수 없었기에 한·일협정 재협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이부영 대표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많은 사료에 더해 2005년부터 공개되기 시작한 한국과 일본의 외교문서를 바탕으로 한 이태진 교수의 논문들은 한국병합조약들의 강제성과 불법성이 국제 학계에서는 물론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도 그간의 조약 및 협정들의 효력에 대한 재검의 필요를 인식시켜주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과연 한·일협정 재협상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쉽사리 예단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간의 한·일관계가 전면적이고 진지한 역사의 재인식, 국제법과 규범의 올바른 해석,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아시아 공동체 수립이란 이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기에 이를 바로잡는 노력은 한국은 물론이려니와 일본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일찍이 안중근 의사의 큰 뜻이나 3·1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동양 평화의 꿈이 이러한 비전을 제시해주고 있지 않았는가.

 6·3으로부터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정치의 이념적 기초인 동시에 내부적 긴장과 갈등의 원천이 된 것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공존관계였다고 김도현 전 차관은 지적하였다. 다만 민족주의가 제국주의 시대에 전개된 독립운동의 중심사상이었다면 민주주의는 냉전 시대, 이데올로기 시대, 남북분단 시대의 동력이었다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국민운동은 역사의 흐름에 반 발짝씩 뒤처지며 따라가는 듯한 아쉬움이 있었다. 주권을 빼앗길 때도, 해방을 맞을 때도, 냉전이 끝날 때도 그러한 아쉬움이 거듭되었기에 민주와 민족을 함께 추구하는 데 필요한 현실성 있는 예측과 처방 능력의 함양을 강조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서진영 교수의 지적대로 통치 또는 지배의 논리와 저항의 논리의 충돌 불가피성에만 매달리기보다는 현실과 이상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 갈등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생산적 관계가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민병석 대사가 제시한 대로 국내 정치가 유발한 4·19와는 달리 6·3은 한·일관계 재정립이라는 외교문제를 둘러싼 국민운동이었음에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이를 계기로 외교정책 수립에도 국민 참여가 필요조건이 됨으로써 근대적 국민국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50주년을 맞는 6·3 주역들의 최대 관심은 지금 한국이 맞고 있는 두 위기를 어떻게 민주·민족의 원칙에 걸맞게 대처하느냐는 것이다. 첫째, 중국의 부상으로 아시아·태평양 시대의 세력 판도가 새롭게 짜이는 전환기에 어떻게 우리의 자주적 입지를 확보하느냐는 과제이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이에 강제당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국민외교가 어려운 시험을 치르게 되어 있다. 둘째, 그러한 시험을 통과하려면 이미 극도의 피로증세를 노출하고 있는 87년 체제의 발전적 전환을 시도하여 인간과 공동체 중심의 새 패러다임을 더 늦기 전에 도출해야 한다. 이를 위한 국민의 지혜와 힘을 모으는 데 필요한 희생과 양보를 호소하는 것이 바로 50주년을 맞은 6·3운동의 시대적 사명일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