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참모, 기업 방문 잦은 총리에게 “너무 나댄다 ”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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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국무총리 잔혹사’다. 안대희(59) 총리 후보자가 지난달 28일 사퇴함에 따라 박근혜 정부 들어 지명된 총리 혹은 총리 후보자들은 예외 없이 불명예 퇴진하게 됐다. 김용준(76)·안대희 총리 후보자가 검증이라는 벽을 넘지 못했다면, 정홍원(70) 총리는 무탈하게 버텼으나 세월호 국면에서 국민적 원성을 사며 경질되다시피 물러나야 하는 처지다.

잇따른 낙마 이면엔 총리라는 자리에 대한 국민의 높은 요구와 기대치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실권도 없는 의전 총리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거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평상시엔 하릴없이 지내다 일 터지면 총대 메고 나가는 게 총리”라는 자조도 적지 않다. 대통령에 이어 국정 운영의 2인자인 국무총리의 위상이 왜 이리 떨어졌을까. 과거 정부의 전직 총리들은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의견을 들어봤다.

“실세 총리는 대통령과 마찰 가능성”
가장 신중한 자세를 보인 이는 이명박 정부 초대 총리를 지낸 한승수(78) 전 총리였다. 그는 “총리는 이른바 실세가 될 수 없고, 실세가 되어도 안 된다”고 단언했다. 이어 “대통령을 보좌해야 하는 틀 밖에서 실세가 되려는 총리는 헌법을 어기는 것이다. 종국엔 대통령과 충돌을 일으켜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요즘 세태가 하도 답답하니, 실세 총리에 대한 향수가 있겠으나, 국가 운영에 있어 실세는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뿐”이라는 입장이다. 총리 역할의 중심축을 대통령 ‘보좌’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반면 다른 3명의 견해는 달랐다. 김영삼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이홍구(80) 전 총리는 “헌법 정신을 구현해야 한다”고 운을 뗐다.

“헌법엔 분명히 ‘국무총리가 국무위원의 제청권을 갖고 있다’고 명기돼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지켜지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거의 사문화되다시피 했다.”

총리가 장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어느 정도 있음에도 사실상 청와대에 의해 100% 결정되는 현실에 우려를 표한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총리의 각료제청권이란 헌법 조항을 편의상 우회해 왔는데, 이게 수십 년간 지속되다 보니 마치 습관처럼 여기게 됐다. (박 대통령이 강조하는) ‘비정상의 정상화’는 이 부분에도 적용돼야 한다. 정치는 현실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고치기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헌법 정신을 놓쳐선 안 된다.” 현 상황을 총리 개인의 문제로 좁히지 말고, 지금 제도 아래에서 총리가 제 역할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둬야 한다는 의미다.

이명박 정부의 두 번째 총리였던 정운찬(67) 전 총리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책임 총리’가 아닌 ‘권한 총리’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도 문제가 생기면 책임지고 나가는 게 총리 아닌가. 대신 권한이 없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권한 준다고 총리가 마음대로 휘두르겠는가. 책임은 대통령이 져야지, 어렵다고 총리만 바꾸려 들면 안 된다. …임명장 받을 때 이명박 대통령에게 ‘제가 할 말은 다 하겠습니다. 때론 듣기 거북한 얘기도 있을 겁니다’라고 했더니 흔쾌히 받아주셨다. 대신 대통령과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했는지 밖에다 까발린 적은 없다. 소신이 있되 인기 영합에 휘둘리지 않아야 하는 게 총리다.”

김영삼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이수성(75) 전 총리는 “1년 반 재임 기간 내내 책상 서랍에 사표를 두고 있었다”고 소개했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사표를 네 번째 냈더니 ‘당신은 왜 이리 자꾸 내나’라며 역정을 냈다. 언제든 그만두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총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대통령이나 그 주변의 견제 때문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정운찬 전 총리는 이런 에피소드를 언급했다.

“총리 시절 양극화 해소 차원에서 수도권 중소기업을 자주 찾아갔다. 그랬더니 청와대 참모 한 명이 ‘총리가 너무 나대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 그래서 ‘총리가 현장을 찾는 데 앞장서야지, 모든 일에 대통령이 나서면 오히려 부담이 는다’고 맞받아쳤다.”

청와대 보좌진이 작은 사안까지 총리를 견제하면 총리는 의욕을 잃고 ‘의전’과 ‘대독’에 머물게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수성 전 총리도 그와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총리가) 청와대 보좌진에게 저자세를 취하면 안 된다. 어림도 없다. 그들은 눈치가 빤하다. 대통령과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대희 총리 후보자의 사퇴에 대해선 대부분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지적했다. 이홍구 전 총리는 “정치란 신뢰며 권위다. 그게 손상됐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스스로 물러난 게 현명했다”고 말했다. 이수성 전 총리는 “안 후보자는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인데, 다른 사람이 다 하니 자기도 모르게 젖어든 게 아닌가 싶다. 총리란 무릇 서민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반면 정운찬 전 총리는 총리 후보 청문회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후보자에 대해 근거 없이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국회의원이 묻고 또 묻는다. 준비해 온 물증을 제시하며 반박을 하려 해도 ‘됐다. 다음으로 넘어가자’며 자르기 일쑤다. 이를 TV로 지켜본 국민은 ‘진짜로 뭐가 있는 게 아닐까’로 믿어버리게 된다. 나도 청문회 때 하도 당했더니 자식들이 울면서 말리더라. ‘왜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총리를) 하느냐’고 말이다. 청문회가 이렇게 후보자 신상털기가 돼선 안 된다. 청문회에서 후보자의 사생활 추궁은 비공개로 하고 정책과 비전에 대한 질의만 공개로 다뤄야 한다. 지금 같은 청문회가 이어지면 야당이 여당 돼도 똑같은 어려움을 당할 거다.”

인사권 가져야 총리 제자리 잡아
전직 총리들의 주장처럼 총리의 권한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데엔 전문가들도 대체로 동의한다.

김광웅 전 중앙인사위원장은 총리의 인사권을 실질적인 힘으로 간주했다. “총리실 산하에 인사혁신처가 신설됨에 따라 총리도 힘을 갖게 됐다. 옛날 총리와는 다르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대통령이 모든 걸 결정할 수 없지 않은가. 이참에 총리뿐 아니라 몇 개 부처 장관까지 야권 인사로 임명하는 거국 내각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안대희 카드를 통해 ‘안정 대통령-개혁 총리’란 구도를 세우려 했던 박 대통령의 의도가 어긋난 건 안타깝다”며 “박 대통령은 현재의 만기친람식 국정운영에서 총리에게 일정 정도 권한을 위임하는 방향으로 갈 것”으로 내다봤다. 임동욱 한국교통대 교수 역시 “권력은 나눌수록 더욱 커지게 된다. 총리의 권한 강화는 결국 대통령 리더십과 의지의 문제”라고 했다.

최민우·전수진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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