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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6)<제58화>문학지를 통해 본 문학비사 40년대「문장」지 주변(55)|나의 문학관|정비석<제자 정비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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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 글을 여기까지 써놓고 돌아다보니 어지간히 오래된 이야기들을 써왔구나 하는 느낌이 절실하다. 선배나 동료를 막론하고 생존해 있는 분들의 이야기는 되도록 피해가면서 고인들의 이야기만을, 그것도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만 써 왔다. 고인들의 이야기만을 써온 관계도 있겠지만 이제는 나도 어지간히 오래 살았구나 하는 느낌이 없지 않다.
우리 문단에는 나와 동갑인 신해성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소설가에 박영준·안수길·김영수가 나와 동갑이었고, 아동문학가로는 윤석중과 이원수도 나와 동갑인 신해성이다. 한동안은 김동리도 동갑인 줄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본인에게 들어보니 호적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나보다 두 살이 아래라는 것이었다.
아뭏든 신해성 작가들도 한결같이 다작을 해온 편이어서 50년대에서 60년대에 걸쳐 한동안은 신문연재 소설을 박영준과 안수길과 김영수와 나와 네 사람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판을 쳐 온 때도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에 들어와 박영준이 가고 안봉길이 가고 김영수가 가서 이제는 소설가 신해성 이라고는 오직 나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다.
싫든 좋든 간에 이제는 내 차례가 온 셈이다.
김영수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는 동갑인 윤석중을 보고 이런 농담을 하고 웃은 일이 있었다.
『신해성 작가들이 모두 가버리고 나 하나만이 남았으니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내 차례요. 윤형이나 이원수도 신해성 이기는 하지만 당신네들은 아직도 아동문학가여서 성인문학가가 되려면 전도가 요원하니까 부득이 내 차례가 온 것 같소.』지금부터 2년 전에 나는 어느 신문에 발표한「문학산책」이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슨 일이 있었다.
『내가 만약 지금 죽으면 신문사회면 하단에 1단 짜리 기사로「작가 정비석씨 별세. 향년66세」라는 기사가 나게 되겠지. 그러면 일반독자들은 「아, 정비석이가 죽었구나. 66세라면 살만큼은 살고 죽었군」하고 말하겠지. 그리고 며칠 후에는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말겠지.』
무슨 별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런 글을 슨 것은 아니었다. 인생이란 본디 그런 것이기에 사는 날까지 담담하게 살다가 담담하게 죽어가고 싶다는 생각에서 사뭇 노인연하고 그런 글을 한번 써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이런 기회에 나 자신이 살아온 족적을 한번 더듬어보는 것도 이제부터 문학을 하려는 청년들을 위해서는 다소나마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나의 인생편력을 약간 살펴봄으로써 이 글의 끝을 막아버릴까 한다.
나는 14세에 소설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먹고 나서부터 오늘날까지 오로지 문학 외곬으로만 살아왔다. 중도에 신문사에 5년 가량 근무하였고, 대학강사와 여고 작문교사로 1년 가량 근무한 일이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의에 의한 부업이었을 뿐 주변머리가 없을 정도로 문학에만 집착해 왔었다. 1937년 문단에「데뷔」하여 오늘날까지 40여 년간을 고스란히 외길로만 걸어온 셈이다.
그러나 나는 문학을 일부 인사들이 생각하듯이 반드시 고답적인 것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난해한 철학적 명제를 내걸고 인생의 진리를 도맡아 탐구하는 듯한 작품을 쓰기보다는 누구나가 알 수 있는 이야기로 재미있고 알기 쉽게 써 나감으로써 일반독자들로 하여금 문학에 쉽게 접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을 쓰려는 것이 나의 문학관이었다.
오직 글만 써먹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신문 연재소설을 안 쓸 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40여년 동안 나 스스로 신문연재소설에 전력을 추구해온 근본이유는 나의 문학관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신문소설 독자란 냉혹하기 짝이 없어서 재미가 없으면 그날은 외면을 해버린다. 독자가 외면을 해 버리면 신문사도 그 날은 그 작가에게는 외면을 해 버리는 것이 통례다.
그런 점을 감안해 볼 때 40여 년간이나 잘 썼거나 못 썼거나 신문연재를 쉬지 않고 계속해 왔다는 것은 나 자신으로서는 매우 강한 일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어떤 부류의 독자가 읽어주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리라. 그러나 나는 독자의 질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독자층의 저변을 확대해나가는 것도 문학이 가진 하나의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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