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김영희 <본사 편집부국장>|여기 한국사람들이 온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워싱턴」을 방문하는 한국사람들은 미국의 고위관리나 의원들을 상대로 한국이 북괴의 위협을 계속 받고 있다는 점을 강조할 때 휴전선에서 서울까지의 거리가「워싱턴」시내에서 「달라스」국제공항까지의 거리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거의 예외 없이 지적한다. 「워싱턴」시내에서 「달라스」공항까지라면 미국사람들은 자동차로 40분 정도 걸려 도착하는 곳으로 익히 알고있어 가장 실감나는 비유가 된다
그러나 같은 한국사람들이「뉴욕」에 가서 한반도 정세를 설명할 때는 이런 비유를 쑥 빼버리고 한국은 군사적으로도 상당히 안정되어 있다는 쪽을 강조해야 한다.
김동조 전 외무장관이 3년 전「뉴욕」에서 경제계·금융계 지도자들 앞에서 「워싱턴」과 「달라스」공항간의 거리를 예로 드는 연설을 한 적이 있다 그 다음날 「체이스·맨해턴」은행은 간부회의에서 그때 논의 중이던 대한차관을 놓고 과연 그것이 감수할 만한 모험인가를 진지하게 논의했다.
77년 말 현재의 미국의 대한투자는 공공차관·상업차관·민간투자를 합쳐서 모두 42억「달러」가 넘는다. 따라서 미국경제의 심장부가 되는 「윌」가가 한국의 정치·군사정세의 변화에 민감하고 한국 고위관료들의 말 한마디에 유수한 은행의 간부회의가 열리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74년 2월12일 「뉴욕·타임스」지는 「리처드·핼로런」기자가 서울에서 보낸 기사를 싣고 ,미국기업들이 한국에서 투자의욕을 잃고 있다고 크게 보도했다. 그 기사에서「핼로런」은 한국정부가 외국투자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그 해 1월에 긴급조치가 발표되고 ,한국관리들이 부패하여 외국기업에 뇌물을 요구하고, 서울은 생활비가 비싸고 도둑이 많기 때문에 미국투자가들이 환멸을 느끼고 있다고 주장했다.
「핼로런」의 기사내용은 다분히 악의적인 데가 있고, 그가 인용한「뉴스」원들도 막연히 미국 실업인 또는 ,중역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 기사가 던진 파문은 적지 않았다 .바로 그 날 미국기업과의 합작투자 협의를 위해 미국에 도착한 어떤 회사간부는 「뉴욕·타임스」지 기사가 극도로 과장된 것이라고 누누이 설명을 해야 했고 ,미국의 기업들은 일단 대한투자계획을 가볍게라도 재검토하는 수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불과 3년이 지난 77년6월6일「뉴스위크」지는『여기 한국 사람들이 온다』는 제목으로 표지특집(커버·스토리)을 실었고 9월에는 포춘지가 『한국에서 기업은 여전히 번창한다』는 제목으로 역시 표지 특집을 실었다. 「뉴스위크」는 한국경제가 지난 15년간 해마다 10%의 성장을 기록하고 수출은 지난 3년간 두 배로 늘었다고 지적했다.
「포춘」도 한국경제의 성장을 태권도의 신기에 비유하면서 미국인들이 1주일에 39.4시간 일을 하는데 비하여 한국사람들은 50.7시간 노동을 한다고 소개했다.
「뉴스위크」와 「포춘」모두가 한국사람들을 근로 중독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유교적인 직업윤리가 근면의 밑바탕에 깔렸다고 설명했다.
지난2, 3년 동안 「뉴스위크」나 「포춘」뿐 아니라 「월·스트리트·저널」을 포함한 주요 일간지들도 60연대의 일본경제를 방불케 하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소개하는 기사를 빈번히 싣고있다.
지금 와서는「핼로런」의 기사가 던진 파문과는 반대로 오히려 한국경제성장과 수출신장의 소개가 지나쳐서 한국이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아간다.
외국기업의 대한 투자열을 자극하기 위해서 한국의 값싼 노동력이 강조되는데 그런 현상은 미국의 섬유·전자·신발류업계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한국상품 수입규제를 촉구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미국이 보는 한국은 수원국가에서 경쟁자로 뛰어 올랐다.
작년 5월 한국이 비고무 신발류 외 대미수출 자율규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에도 미국언론의 한국 경제성장의 찬양이 작용했다.
한국의 해외취업이 7만명에 이르고, 특히 「오일·달러」가 모여드는 중동일대에 한국 상품과 용역이 집중되는 것을 보고 미국사람들은 한국을 그들의 후견 하에 있는 후진국이라고 보기보다는 국제시장에서의 골치 아픈 경쟁자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행정부관리들이 의회에서 철군결정의 배경을 설명할 때도 예외 없이 한국의 「괄목할만한」경제성장을 들고있다. 「카터」의 대통령 당선으로 철군방침이 확실해졌을 때「월·스트리트」는 한때 불안한 시선으로 한국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한반도 주변정세의 안경과 지금 실속 없이 널리 선전되고있는 철군보완조치로 「월·스트리트」를 떠나는 『한국행「버스』는 다시 황금노선의 하나로 꼽힌다 .한국은 싫든 좋든 미국의 거구 앞에 경쟁자로 나서게 된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