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서울… 기내방송에 울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근양 특파원, 귀환기 동승기】24일 하오 6시30분. 『여기는 서울입니다』라고 여승무원이 고별안내 방송을 시작했을 때 「악몽의 여정」을 마감하는 승객들의 기쁨과 안도감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하나 그것도 일순간이었다. 『승객여러분, 불행하게 유명을 달리한 손님 두 분의 명복을 빌면서, 또 불굴의 용기와 침착함으로 승객여러분을 생환시켰으나 우리와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한 승무원 2명의 조속한 송환을 기원하면서…』라고 애조 띤 고별방송이 이어졌을 때 승객들은 안타까운 침묵으로 묵념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곧 좌석에서 일어나 기내앞뒤를 오가며 구사일생을 같이 겪으면서 지기처럼 돼버린 낮 익은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기에 부산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KAL특별기의 승객들에게는 「다시 태어난」기쁨만이 넘쳐흘렀다. 승객들 누구에게서도 생사의 갈림길을 헤맸던 사람들의 어두운 그림자를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중상자 박세철씨(32·동서산업요업부 차장) 등의 얼굴에서도 밝은 미소만이 잔잔했다. 김우황씨(38·내셔널·플라스틱 부장) 등 생환한 한국인 35명은 「앵커리지」에서 동경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구동성으로 「다시 태어난」 느낌이라면서 구사일생의 위기를 넘긴 행운을 서로가 평생토록 잊지 말고 우정을 돈독히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아「동갑회」를 만들기로 하기도 했다.
단 사흘밖에 안 되는 짧은 공동생활이었지만 생사의 고비를 넘긴 이들에게는 어언 백년지기처럼 따사로운 정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한국인·일본인·미국인 등 1백3명의 승객들은 국적을 가릴 겨를이 없었다.
그들은「샴페인」잔을 부딪치며 서로의 무사생환을 자축했고 지나간 악몽과 순간 순간의 위험스런 상황들을 얘기하기에 지칠 줄 모르는 저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 일본인은 『죽느냐, 사느냐의 55시간의 조난 동안 아기를 품에 안고있던 엄마들의 모습은 그 어느 누구를 보아도 「성녀」의 참모습 그대로였다』고 모성의 진면목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멀리 서독의「뒤셀도르프」에서 오랜만에 고국을 찾아오다 조난 당한 김태순씨(28)는 『승객 모두가「시트」속에 머리를 파묻고 쥐죽은듯이 앉아있어야만 했던 총격의 순간에도 아들「토머스」군(5)만이 나의 전부였다』고 울먹이며 회상했다.
승객들은 『어머니들이 비상착륙 후 혹한에서 자기들이 입고있던 외투를 벗어 아이들에게 입히더군요』라고 모성애를 극찬했다.
특별기가 태평양 상공에 들어서서 기내방송이 비명에 간 승객 두 분의 명복을 빌자고 했을 때 조금 전까지 만해도 축배로 부산하던 기내에는 순식간에 숙연한 분위기로 돌변했다.
조중훈 KAL사장은 모든 좌석을 돌면서 승객들을 일일이 위로했고 서울에서 급파된 의사 계원철 박사는 환자들의 용태를 수시로 진단했다.
KAL측은 동경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승객들에게 특제 초밥을 준비했다. 「헬싱키」에서 김포까지의 22시간에 이르는 긴 여로는 허탈과 흥분, 「두 번째로 태어났다」는 희열이 얽힌 대「드라마」의 연속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