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물가상승 못따르는 임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영등포구 개봉동에 있는 S섬유 회사회의실-. 연례적인 임금인상 통고를 위해 근로자 대표가 중역들 앞에 앉아 있다.
◆회사측=금년에는 각종 원료가격이 너무 올라 지난해의 20%수준은 절대 보장할 수 없다.
◆근로자측=생필품 가격이 엄청나게 오른 것을 뻔히 알면서 그러는가? 우리들이 먹고 쓰는 값은 보상해 줘야할 것이다.
◆회사측=그것은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다.
급등하는 물가 상승은 임금체계를 크게 요동시킨다.
물가상승 때문에 임금이 약간 오르는 것보다는 물가안정을 통해 임금상승 압력을 진정시켜야 하는 필요성이 절실해 지고 있다.
『가계부를 무엇 하러 씁니까? 그런 것 안쓴지 꽤 됐어요』 (이순애·성북구·삼선동)라고 말하는 주부의 표정…모 여성단체가 모범 주부라고 소개해서 찾아간 기자를 쑥스럽게 만든다. 남편의 봉급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조금씩 오르는데 식품비·주거비·서비스 요금 등은 불규칙적으로 크게 올라 가계를 규모 있게 꾸미기 위해 쓰는 가계부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얘기. 대체로 주부가 가계부를 적을 때는 오붓하고도 평범한 목적이 있다.
소비 지출을 가능한 억제해서 저축을 해 현재보다 나은 집, 보다 맛있는 음식, 풍족한 문화생활을 해보자는 소박한 꿈. 그러나 이와 같은 알뜰한 생각은 시장에 찬거리를 사보면서 아기가 아파 병원에 들러 보면서 조금씩 흐려지는데다 주위에서 「아파트」나 증권 투기를 해서 한목 잡았다는 얘기라도 들으면 더욱 맥이 빠진다.
물가 상승은 경제 전반의 활동을 왜곡시키고 장기적으로 투자 의욕도 상실케 함으로써 국민 경제의 확대 재생산을 저해하는 것 뿐 만이 아니라 가계의 합리적 운영조차 위협하고 있다. 이 때문에 본사가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물가안정』을 강력히 여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최근 우리 나라의 임금상승의 특징은 ①수급불균형으로 인한 대졸 초임과 기능직 임금이 급상승 ②관 주도하의 일부 업종 임금상향 조정 등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한국 생산성 본부가 집계한 77년도 노동 생산성 지수를 살펴보면 74∼76년간 연속11%이상의 높은 향상을 보던 것과는 달리 4·2%라는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 일부에서의 임금 상승과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노동생산성 지수가 낮아진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으나 아직도 물가불안 기조하에서 광범하게 존재하는 저임금 상태가 가장 주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저임금 근로자는 사실상 물가 상승의 피해를 가장 많이 겪고 있는 사람들. 업주가 노동청의 권유를 받아 평균 l5%를 올린 T금속공업(영등포 구로공단)에 숙련 기능공으로 6년째 근무하고 있는 김상철씨(31)는 현재13만원을 받고 있다. 『몇 년 전의 살림살이나 지금이나 나아진 것이 별로 없고 아직 셋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플레」의 소득 재분배 효과라는 그럴듯한 용어는 저소득층의 소득향상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합리적으로 가로막고 있다.
연초에 이 땅에도 임금논쟁이 있었지만, 논쟁의 초점이 여간 흐렸던게 아니다.
저임금을 없애 생활의 기반을 다져 주는 것, 물가상승을 억제 해 실질 임금을 보장해 주는 것이 논쟁의 초점이 됐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각종 원자재 가격이 오른데다 제품 값은 당분간 인상해 줄 수 없다는 당국의 통고에 따라 D공업측은 그렇다면 3만원 이하 저임을 당장 다 올려 주기는 곤란하다면서 노동청에 양해를 구하고 있다. 국산 기계화 전문 중소기업으로 지정돼 발판을 굳혀 가고 있는 D공업의 P사장은 『제가 올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반 원료가격이 오르니 회사를 살리자면 어떻게 할 수가 없읍니다』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물가안정을 관리 가격이나 행정 지도가격으로 억눌러 보자는 견해는 단기적으로 기업 수지만 악화시키며 더구나 임금상승 압력이 전 업종에 불어닥치고 있기 때문에 합리적 경영의 여지는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 이 같은 비합리성은 음성적인 가격 상승만 유발시키고 제품 품질을 떨어뜨려 장기적으로 물자 부족을 유발한다.
따라서 국내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이란 기대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보면 물가안정이야말로 경제안정을 위한 초석이다.
물가안정은 충분한 물량공급을 전제로 한 수급의 균형을 이루는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진단>임금기준은 생계비 지수로
『물가가 안정된 후라야 요금 인상을 검토할 수 있다』(서석준 경제기획원차관)-지난번 버스회사 대표들이 운전기사와 안내양의 대우를 올려 준다면서 당당하게 요금인상을 요구했을 때의 답변이다.
『생산성 범위 안에서 일정율의 인상만을 인정하겠다』(김재철 경제기획국장)는 것은 올해 물가 당국의 임금정책 「가이드·라인」. 그러나 물가안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각종 임금은 필연적으로 상승 압력을 받게 마련이고 그것을 행정지도로 억제하는데는 당연히 문제가 발생한다.
『물가안정을 이유로 임금 상승을 억제한다는 것은 전후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물가안정이 전제된 후라야 그 같은 견해는 납득할 수 있읍니다』(대한노총 B씨).
전문가들은 임금 상승으로 나타나는 경제성장의 결실이 물가상승으로 위축되지 않기 위해서는 국내외 경제의 균형회복을 기본 정책방향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통화·재정·해외부문에서의 물가상승 요인을 해소하기 위해 지금이라도 근본적인 정책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또 임금상승의 직종별·학력별·산업별기준을 정할 뿐만 아니라 물가기준을 소비자 물가가 아닌 생계비지수를 작성해서 근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비자 물가 상승율이란 평균 개념인 것을 감안하면 개별 근로자들의 일상 지출과는 거리가 많습니다. 따라서 일정한 생계비지수 항목을 선정, 기준으로 삼아 노동 생산성 향상범위 안으로 흡수해야 할 것입니다』 (경영자협회 김창선과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