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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제황산엔 봄이 활짝… 벚꽃망울이 방긋|진해 군항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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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반도 동남단에 자리잡은 해군의 요람지 진해시. 시가지를 온몸 뒤덮고 있는 5만3천여 그루의 벚나무가 4월을 기다렸다는 듯이 한겨울 눈보라에 시달린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장복산(해발6백50m)을 꿰뚫어 숨통을 튼 진해의 어귀-마진 「터널」에서 여좌동 관문까지 4㎞ 남짓한 간선도로에는 현란한 벚꽃 가로수가 꽃송이의 「터널」을 이룬다.
시내 한복만에 우뚝 솟은 제황산(해발1백2m) 진해탑 추위와 선남선녀의 사랑의 속삭임이 얼룩진 일년계단(3백65계단) 양쪽에도 연분홍 비단을 두른 듯 벚꽃이 만발했다.
충무공 동상 주변을 비롯한 해군 통제부·해군사관학교 교정은 벚꽃의 진원지. 수백 그루의 40∼50년생 아름드리벚나무들이 어깨를 겨루고 있다.

<전 시가가 벚꽃 밭>
이밖에 장복산 공원(2백92ha)·은산공원(1백5ha)·웅천공원(4백35ha)에 촘촘히 들어선 벚나무들도 꽃보라를 휘날리며 연인들의 밀어를 감싸준다.
일본 국화라 하여 한 때 괄시를 받던 「사꾸라」꽃은 그 원산지가 제주도임이 밝혀지면서 우리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광해에 벚꽃이 심어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인 1931년께.
해방후 왜꽃으로 미움을 받거나 관리소홀로 10여만 그루의 벚꽃이 대부분 고사하여 죽은 도시가 되자 진해시민들과 재일 동포들은 73년 봄 『벚꽃 진해를 다시 찾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벚꽃나무 식수운동을 펴기에 이르렀다.
「도오꾜」에서 발족된 진해 유지회에서는 74년 봄 1만여 그루의 벚꽃 묘목을 보내왔고 이듬해 다시 1만2천여 그루를 헌수했다.
현해탄을 건너 메아리 진 벚나무 식수운동은 5년만에 결실을 보아 현재 5만3천여 그루가 시내전역에 뿌리를 내려 벚꽃 식물원을 이루고 있다.
상춘의 「메카」-벚꽃의 종류는 4백여종. 이 가운데 산벚과 왕벚·수양벚·겹벚이 우리 나라 벚꽃의 대종을 이룬다.

<백30만명 몰려와>
76년 말 한국원자력연구소 한창렬·김영진 박사와 미 「캘리포니아」대 양서영 박사·제주대 정은희 교수 등 공동연구 「팀」은 한국식물학회에 제출한 논문에서 『일본의 국화인 왕벚나무가 우리 나라에 야생하고 있는 산벚과 들벚의 중간잡종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고 보고, 제주도가 원산지임을 밝혔다. 결국 한일 학자간의 왕 벚꽃 논쟁은 한국학자들의 승리로 끝났었다.
벚꽃이 필 무렵이면 진해 군항제가 화려하게 펼쳐져 시가지는 관광객의 상춘행렬이 줄을 잇는다.
올해 16회를 맞은 군항제는 2일부터 16일까지 보름동안 진행되고있다.
지난1일 저녁 점 등식과 진해여고생들의 강강수월래로 전야제의 막을 연 군항제는 3일 경축식·「카드·섹션」·군항대 행진 등으로 「피크」를 이뤄 예술과 체육의 대 잔치가 풍성히 열리고 있다.
장관을 이룬 벚꽃 숲 속에는 혼자 걷기가 쑥스러울 정도로 모두 쌍쌍의 물결. 그림 동화의 삽화 같은 진해시는 휘황찬란한 오색등과 함께 사랑·우정·충절의 밤이 무르익는다.
이 기간 동안 진해로 찾아들 예상 관광객은 1백30여만명. 굳게 닫혔던 통제부의 철문이 열리고 거상관광이 허용되어 제1벚꽃 강을 감상할 수 있게됐다.

<난공불락의 요새>
남해안에 흩어진 크고 작은 섬들이 황파를 막는다 하여 이름한 진해. 특히 공중으로부터의 급강하폭격이 불가능, 군항기지로서는 천혜의 요새다. 이조 말엽까지 웅천군(현 창원군) 중면으로 다스려지다 일제침략과 함께 일인들의 눈에 군항으로서 알맞은 지형임이 발견되어 일노전쟁의 역원지가 되었고 해방후 계획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55년9월1일 시로 승격된 후 도시면적 63.93평방㎞에 인구는 13만8백21명(2만2천1백16호)으로 불어났다, 인구의 60%가 군인과 군속,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로 구성된 군사 도시이자 소비도시.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여서 살기에 쾌적합니다. 그러나 바쁘게 뛰는 생활인의 고동을 느낄 수 없어 아쉽습니다』-. 진해에서 20년째 산다는 김길수씨(절·상업)는 좀더 발전의 맥박을 느낄 수 있는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글 김원태 기자·사진 채흥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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