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의 「프리마·발레리나」한국여인 8년전 탈출…자유중국에 정착|고화정 여사와 회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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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타이베이=이수근 특파원】『1년 중 설날에 한번 닭고기를 배급받던 중공에서 살다가 언제든지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자유세계에 살게 되니 설날에도 설 기분이 안나요.』 8년 전 중공을 빠져 나와 지금은 자유중국의 「타이베이」(대북)에 정착한 전 중공 무가극의 주역 여배우였던 고화정 여사(27)는 그런 말로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차이를 간결하게 표현한다.
넓은 이마, 오목한 콧날, 갸름한 얼굴에 키가 1백60cm인 고여사는 언뜻 빼어난 중국 여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 외모의 고여사가 중공에서 드물게 탈출해 나온 한국인 중의 한사람일 뿐 아니라 중공에서도 이름을 날리던 「발레리나」였다면 얼른 믿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강청(모택동 전 중공당 주석의 미망인)의 전성기에 강청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문화대혁명 때 중공전역을 누비면서 수천만의 젊은 홍위병들을 열광시켰던 유명한 상해 무극단의 주역 여배우가 고화정씨라는 사실은「타이베이」의 「중앙일보」보도로 처음 밝혀졌던 것.
고여사는 아열대 지역의 정취를 물씬 풍겨주는 「파파야」나무가 유리창에 비치는 「타이베이」의 한 사무실에서 『좋아하는 순수「발레」를 할 수 없고 잘 먹을 수 없는 환경』때문에 중공을 탈출하게 됐다고 했다.
고여사는 51년 상해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모두 한국인. 아버지는 상공업을 자영했고 어머니는 산부인과의사여서 생활이 비교적 넉넉했기 때문에 5세 때부터 「발레」수업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13세 때 중공이 최초로 소련에 보낸 17명의 「발레리나」유학생단에 선발되어 소련에서 정통「발레」를 익혔던 「행복한 소녀」였다.
그러나 고여사는 『중공으로 돌아가 강청이 외국귀빈들에게 보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하던 상해 무극단에 편입됐을 때 정통「발레리나」로 대성하겠다는 꿈을 버려야 했어요』라고 중공시절을 회상한다.
고화정 여사는 혁명 경극 중 강청이 가장 애착을 가진「백모녀」(이 경극은 중공의 대표적 가무극으로 외국에도 소개됐음)의 주역으로 발탁되어 문화혁명 때 중공전역을 순회공연, 수천만의 젊은 홍위병들에게 계급투쟁의 혁명정신을 심어주는 선전 도구로 활약했다.
때문에 그녀는 모택동을 비롯, 주은래(전 수상), 지금은 숙청된 왕홍문 등 「4인조」와 등소평 부수상 등 당대의 중공권력층과 가까이 접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는 것.
『주은래가 가장 인기를 끌었어요. 모는 당시에 이미 귀가 멀고 말을 더듬거렸답니다. 강청은 기품은 있었지만 맵시내기를 좋아해 서양배우들처럼 호화로운 몸단장을 했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고여사는 중공고위층의 사생활이 인민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호사스럽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꼈다고 했다.
67년 말 문혁의 열풍이 자신과 가족에게도 몰아닥쳤다. 외국인에다 자산계급의 좋지 못한 출신 성분이라는 이유로 중공당국은 그녀의 무대출연을 막았고 가족들에게도 박해의 손길을 뻗쳤다.
그녀와 양친은 68년 중공을 탈출하기로 결심, 「홍콩」에 있는 친척의 재산을 처분해서 돌아오겠다는 이유를 중공 외사처에 둘러대고 70년 마침내 중공을 빠져 나왔다.
75년 유명한 중국육상선수 소문화씨(대만치아상전 체육교수)와 혼인해서「타이베이」에 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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