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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독점하면 강해지고 나누면 커지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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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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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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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시대를 반영합니다. 그 시대 국민이 느끼는 결핍감을 정확히 건드려주는 쪽이 승리합니다. 결핍감은 기대감일 수도 있는데 노무현 시대의 정의, 이명박 시대의 경제 같은 게 그런 것들입니다. 시대정신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시대정신은 후보자가 발견하고 만들어 갑니다. 2014년 지방선거엔 두터운 안개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세상을 뒤바꾼 세월호의 무게를 정치가 어떻게 감당해 나갈지 아직 답이 안 나왔기 때문입니다. 양대 정당이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외치고 있지만 유권자는 ‘최후의 안전은 내가 지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유권자의 결핍감을 채울 시대정신이 완성되지 않은 셈이죠.

 돌이켜 보면 2010년 지방선거의 시대정신은 태풍같이 강렬했습니다. 무상(無償)급식이라는 시대정신이었죠. 당시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발굴한 이 공약은 논쟁이 붙을수록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한나라당이 사회주의적 발상으로 몰아붙였고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지만 맥을 못 췄습니다. 민주당이 김 교육감의 공약을 당론으로 정하면서 무상정신은 순식간에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16곳 특별·광역시 가운데 여당인 한나라당이 이긴 건 6곳밖에 안 될 정도로 참패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3년 차 지방선거에서 결정타를 맞아 바로 레임덕에 들어갔습니다. 무상급식은 보편적 복지정신으로 확산돼 2012년 총선과 대선 판까지 흔들더군요.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할 수 있었던 건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국민 복지국가론’으로 올라탔기 때문입니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고 했습니까. 그 태풍 같았던 무상정신이 이번 지방선거에선 동력을 잃었습니다. 정치인으로 변신해 경기도지사에 도전한 김상곤 전 교육감이 무상교통을 들고나왔다 실패했지요. 세월이 흘러 많은 사람이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무상교통은 과대 광고이며 정확한 표현은 버스공영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김상곤의 실패는 2014년 지방선거에서 무상정신의 실패를 상징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진실은 안전 가치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안전은 아직 미완성의 시대정신입니다. 안전엔 비용이 들고 그걸 스스로 기꺼이 지불하겠다는 국민의 승인이 있을 때 완성될 것입니다. 여야 정치지도자나 서울시장 혹은 인천시장이나 경기지사 후보들이 ‘민방위·재난 훈련을 실제 상황과 똑같이 실시하겠다’ ‘여객선 승선 때 안전 규제를 강화하겠다’며 국민을 불편하게 하는 공약을 경쟁적으로 내놓는 게 필요합니다. 세월호 지방선거의 시대정신은 안전을 위해 국민이 불편을 받아들이겠다는 합의 아닐까요. 후보자들이 유권자를 향해 국민불편을 감수해 달라고 요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세월호는 대통령에게도 불편한 변화를 요구합니다. 권력의 독점에서 권력의 위임으로, 수직 지시에서 수평 대화로. 세월호 앞에서 박 대통령은 혼자였습니다. 총리도 장관도 해경청장도 대통령을 막아주지 못했습니다. 피해 가족들은 중간의 책임자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책임자들의 부실과 무능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책임자다운 스스로의 의사결정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죠. 대통령이 크고 작은 사안들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 보니 중간 책임자들이 설 자리가 없었던 겁니다. 사람들은 대통령 1인한테 집중된 권력이 경우에 따라서 얼마나 허약하고 부실한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지방선거가 세월호에서 드러났던 ‘외로운 박근혜’에 대한 평가의 측면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시대는 대통령에게 강한 권력보다 크고 넓은 권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강한 권력은 독점에서 나오지만 크고 넓은 권력은 나눔에서 나옵니다. 변하지 않는 게 사람의 성격이라고 하는데 시대의 요청 앞에선 하기 싫은 일도 하는 게 지도자의 길입니다. 대통령이 새 총리 후보도 지명했고 청와대와 국정원도 개편했습니다. 이들이 요소요소에서 자기 권한을 재량껏 행사할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세월호 시대정신은 국민과 대통령에게 불편한 변화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