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前 농구감독 방열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가장 좋은 슛 자세는 볼을 이마까지 들고 볼의 밑부분을 거쳐 바스켓을 겨냥하는 것입니다."

봄날의 햇살이 쏟아져 꽃망울을 터뜨리는 성남의 경원대 캠퍼스. 올해부터 사회체육대학원장을 맡은 방열(方烈.62)교수는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교양체육을 강의하고 있다.

方교수는 자신의 수업에서 가장 먼저 농구에 대해 강의한다. 학생들이 여전히 그를 '방감독'으로 기억하고 그로부터 농구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농구계에서 方교수는 특별한 존재다. 농구 명문인 경복고와 연세대에서 농구를 했고, 1962년부터 64년까지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다. 68년 지도자생활을 시작해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결승에서 한국이 처음으로 중국을 꺾고 우승할 때 벤치를 맡았다.

남자실업팀 현대.기아의 창단 감독을 맡아 단기간에 정상에 올리고 농구사에 남을 명문으로 키웠다. 89년 연세대에서 석사(체육교육)학위를 취득한 후 90년 일선에서 은퇴,경원대에서 교육과 연구에 몰두하더니 이젠 교육자로서도 입지를 탄탄히 했다. 99년에는 한국체육대에서 박사 학위도 땄다.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농구를 떠나있지 만은 않았다. 지난해 8월까지만 해도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아시아농구연맹(ABC)중앙이사회 이사.세계농구코치협회(WABC)아시아지역 회장 등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했었다.

그의 인생에는 하나의 굵은 선이 있다. '청년 정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 두려움이 없고 '승부사'라는 별명처럼 도전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그는 수강생을 가장 많이 끌어모으는 교수로 인정받고 있다. 전공서적 뿐 아니라 스포츠언론 분야 서적까지 저술해내는 엄청난 의욕이 놀랍다. 그 놀라운 정열의 근원을 方교수 인생의 명장면 몇 곳에서 엿볼 수 있다.

#장면 1:83년 홍콩에서 벌어진 국제농구대회 일본전. 일본의 센터 키다하라(2m)가 한국 골밑을 휘저었다. 심판은 3초룰(공격자가 3초 이상 골밑에 머무를 수 없도록 한 규칙)을 잊은 듯했다.

方감독이 타임을 신청하고 심판을 불렀다. 언쟁을 벌이려나? 아니었다. 대신 유창한 영어가 터져 나왔다. "저 선수 발 옆에 잔디가 돋겠소." 심판은 파안대소하고 말았다.

#장면 2:90년 여의도 H호텔 일식당. 기아농구단 총감독을 맡고 있던 방열씨가 젊은 후배와 마주앉았다. 후배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다시 생각을…." 方감독은 손수건을 건네며 대답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기회가 와서 참을 수가 없네." 이날 이후 그는 감독에서 교수로 변신했다.

#장면 3:94년 국제군인농구대회 본부가 설치된 타워호텔에서 국제농구연맹(FIBA) 주최 코치 클리닉이 열렸다. 강사는 방열. 주제는 '장신 팀에 대비한 단신 팀의 수비 훈련'.

강의가 끝나자 아시아농구연맹(ABC) 마르텔리노 사무총장이 강단으로 뛰어올라갔다. "닥터 방! 우리 ABC에 당신같은 코치가 있다니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클리닉에 참여한 코치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方교수는 요즘 농구판을 자주 찾지 않지만 지인들은 그가 어느 때보다 농구에 몰두하고 있음을 안다. 지도자 생활을 하는 제자들은 수시로 그를 찾아 지혜를 구하고,구단 관계자들은 이기는 법을 묻는다. 그때마다 方교수는 되뇐다.

"난 게으른 학자입니다." 그러나 '열방'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이 정열적인 교수는 그의 말처럼 게으르지를 못하다. 지난해엔 길거리 농구용 코트를 새로 개발해 특허까지 냈다.

글=허진석,사진=김성룡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