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 밖의 겨울>(1)-조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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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인물>
실장 타이피스트(여)
수습사원A
수습사원B
수습사원C

<무대>
어떤 회사의 비서실
무척이나 급한 듯한 타자기 소리. 또는 사무용기들이 바삐 움직이는 잡음-소리들은 점점 확대되어 무대를 압도해 온다.
드디어 그 소리들의 중량에 압도당한 무대는 진실처럼, 참으로 진실처럼 굴복되어 있다. 마치 그것이 그들의 허위인양.
잠시 후.
극히 단조롭게 남아도는 타자기소리는 굴복되어버린 그 공간을 더욱 협소하게 한계 지운다. 그 속에서 가식처럼 허우적거리고 있는 그들의 진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수화기를 들고 어릿광대 같은 몸짓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시늉하고 있는 실장 그 앞으로 나란하게 앉아있는 수습사원 A·B·C-이웃한 타이피스트가 무료함과 초조가 순회하는 그들의 표정을 가끔씩 훔쳐보곤 한다.
실장-(아예 수화기에 매달려 있다.)
말을 타고 아스팔트 위를 질주한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자동차를 이용하십시오. 시속 백이 십으로 두 시간쯤 달린 지점에서 하차하시면 우유와 코피를 들고있는 소년이 안내할 겁니다. 물론 거기서부터는 도보를 각오하셔야 합니다.
30분 가량 야산의 능선을 쫓다 보면 활처럼 구부러진 제방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이때 주의하실 점…<소년을 돌려보내라>…그런 팻말과 함께 소년을 돌려보내셔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네.
활처럼 구부러진 그 제방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합니다. 아, 주의하십시오. 현기증, 현기증입니다. 아무 기색도 없이 갇혀있는 수심의 위협이 그런 현기증을 유발케 합니다. 바로 그 지점입니다.…현기증과…현기증을 느끼게 되는, 바로 거깁니다. 거기…조금 있으면 제방 밑으로 램프가 켜집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들으실 것입니다.…가느다란 바람이 램프 불을 가뭇거리게 할 것입니다. 바로 이때,…램프 불이 가느다란 바람결에 가뭇거리고 있을때…그 왼쪽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왼쪽입니다, 네.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서며 땀을 씻는 실장. 다시 긴장하며 자세를 정돈하는 수습사원A·B·C.이 셋의 모습이 너무나 닮아 보인다.)
실장-여러분, 계속합시다.
(순간, 잘 훈련된 사병처럼 수습사원 A가 민첩하게 일어나 부동의 자세로 선다.)…생각해 보셨습니까?
수습사원A-…그건 함정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장-그 함정에 빠져 본 기억은 있습니까?
수습사원A-대단한 놈이었습니다.
실장-어떤 놈이었습니까?
수습사원A-모든 걸 책임진다고 해 놓고선 결국 아무 것도 책임진 것이 없었습니다.
실장-그럼 당신이 거기 그렇게 서 있는 이유는 뭡니까?
수습사원A-이유요?
실장-네, 이유.
수습사원A-앞으론 절대로 함정에 빠지는 일을 삼가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실장-함정?
수습사원A-네, 함정.
실장-앉으시오.
(A가 민첩하게 앉는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왜 여기 앉아있는가 아니면 서있는가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면 잘못입니다.
수습사원B-물론입니다.
실장-일어나시오.
(민첩하게 일어난다.)
강아지를 키워 보셨습니까?
수습사원B-동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실장-생후 이십 팔일 된 강아지를 방에서 재워야 합니까, 아니면 밖에서 재워야 합니까?
수습사원B-그야 뭐….
실장-나는 방에서 재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수습사원B-동물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실장-부인을 사랑하십니까?
수습사원B-아직 미혼입니다.
실장-여자들의 무책임한 결심은 때론 깔처럼 구부러진 제방 밑에서 밤을 새워야하는 인간을 조작해내기도 합니다.
타이피스트-(당황한 듯) 실장님!(순간 실장과 타이피스트의 시선이 마주친다. 사이)
수습사원B-그러니까 강아지를 방에서 재운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장-한 마리의 개와 한사람의 여자를 한방에서 재웠습니다.
수습사원B-지극히 비위생적입니다.
수습사원C-(갑자기 흥분하며) 부도덕입니다. 개와 사람, 동물과 인간의 무차별은 인간 스스로가 인간임을 포기한다는 부도덕입니다.
수습사원A-(갑자기) 우선 순위가 문제되어야 합니다. 개보다 못한 인간관 인간보다 훌륭한 개, 그런 순위를 정하지 않고는 모든 것이 함정입니다.
실장-아내가 말했습니다. 「강아지를 밖에서 재워라.」
수습사원C-옳습니다!
수습사원B-옳습니다!
수습사원A-함정입니다!
(사이)
실장-수천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이 자리에 앉게된 여러분을 비로소 축하합니다.
수습사원들-(동시에) 감사합니다.
실장-그러나 말을 타고 아스팔트 위를 질주한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수습사원들-(동시에) 네.
실장-자동차를 이용하십시오.
수습사원들-(동시에) 네.
실장-시속 백 이십으로 두 시간 쫌 달린 지점에서 하차하십시오.
수습사원들-(동시에) 네?
실장-도보로 약 삼 십분 가량 야산의 능선을 쫓다보면 활처럼 구부러진 제방이 시야에 들어 올 것입니다.
수습사원들-…?(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실장-활처럼 구부러진 제방을 따라 걸어보십시오.
타이피스트-실장님!
실장-주의하십시오. 현기증, 현기증입니다.
수습사원들-실장님!
(순간, 더한 중량을 엄습시키는 전화 벨. 사이. 매달리듯 수화기를 드는 실장)
실장-네…충실합니다. …네 …훌륭합니다 …네 …가능성. (수화기에 매달린 실장이 손짓으로 타이피스트를 부르자 민첩한 동작으로 타자된 용지를 실장의 그 손에 건네주는 타이피스트, 실장은 그것을 읽는다.)
주의하십시오. 현기증, 현기증입니다. 아무기색도 없이 갇혀있는 수심의 위협이 그런 현기증을 느끼게 합니다. 바로 거기입니다. 조금 있으면 제방 밑으로 램프가 켜집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들으실 것입니다. 가느다란 바람결이 램프 불을 가뭇거리게 할 것입니다. 바로 그 때입니다. 그 왼쪽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왼쪽입니다. 네? (사이. 실장과 타이피스트의 시선이 마주 치지 타이피스트의 손마디가 타자기의 건반에 서서히 올라앉는다.)
실장-네.
(타자기 소리 침묵)
아이오
(타자기 소리 침묵)
지시한
(타자기 소리 침묵)
주의사항
(타자기 소리 침묵)
명심할 것
(타자기 소리 침묵)
실장-(단호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대기실로 안내하시오. 더불어 이 시간이후 모든 외래자의 접견을 사절합니다.
타이피스트-네.
(타자 된 종이를 빼 들고 일어서며) 따라 오십시오.
수습사원들-네.
(간호원의 지시에 순종하는 환자들처럼 따라 나간다.
그 공간에 두려움처럼 우뚝 서 있는 실장.
잠시 후,
타이피스트의 낭랑한 그 소리들을
복창하는 수습사원들.
소리는 맹종처럼 가식되어 있다.)
수습사원들의 소리- 네 아이오 네
네 아이오 네 아이오
네 아이오 네
네 아이오 네 아이오
네 아이오 네
네 아이오 네 아이오
네 아이오 네
네 아이오 네 아이오
네 아이오 네
네 아이오
네 아이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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