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천수관음가-박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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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가 한송이 꽃이었을 때
우리를 스쳐 가는 모든 것은
바람이었네.
아직 꽃피우지 못한 마을의 아이들은 눈이먼 채
불감의 하늘 속으로
잃어버린 점자를 찾고 있었지.
덫에 치인 꿈은
가위눌린 채로 시위 잠을 자고
젖줄 끊긴 살 속으로
뜨거운 오열의 소리는 파고 들었네.
어느 빈 뜨락에도
아침을 몰고 오는
소망의 작은 새떼는 날아오지 않고
우리들의 양식은
쉬임 없이 강물에 자맥질하는
회한이었네.
층층이 내려서는
의식의 깊은 벽에
채찍의 겨울은 또 다른 장막을 둘러치고
바람은 무거운 영어마다 어둠이 부딪쳐 흩어지는 창을
흔들며 있네.
은성했던 꿈의 부스러기가
부서져 내리는 길은 길마다
낮게 낮게 매몰되고
긴 회랑을 걸어서
우울의 계단을 빠져 나올 때
다시 어둠으로 차는 굴레.
모든 사념은 기실
풀었다가 다시 짜는. 페넬로페의 직조였네.
돌아다보면
그곳엔 오랜 묵시의 강이 흐르고
하늘을 더듬는 아이들의 작은 손이
기폭처럼 바람에 찢겨 나가고 있었지.
삼계에 가득히
천사들의 흰 은총은 내려앉고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청댓잎 푸른 가지를 비집고
피어오르는 아침은.
해조음에 실려오는
비취 빛 청아한 아침 노래는.
오랜 동면의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외출을 서두르고
회색의 겨울은
부활의 눈을 뜬다.
(주:<페넬로페>=「트로이」전쟁에 출전한 남편을 기다리다 수절한 「오디세이」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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