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5)바둑에살다|상연-치훈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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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기원유학 제1호인 김인8단보다 불과 17일이 뒤늦은 3윌26일에는 조상연 (당시4단) 이 도일했닥 간뒤에 풍문으로 전해오는 것은 관서기원소속으로 5단을 인허받았다는등 이상한 소식이었다. 묘한 일도 있구나 하면서 잠자코 지내고 있는데, 하루는 「기따니」 (목곡실) 선생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자네 조카가 일본에 왔다는데 의당 나의 문하로 보내야 옳은일이거늘 어째서 관서기원으로 보냈느냐』는 꾸지람과 함께 지금이라도 빨리 자기에게 보내라는 독촉이었다. 「기따니」 선생의 말씀은 지당하고도 고마운 것이었다.
김인같은 후배를「기따니」문하로 추천하면서 막상 조카인 상연군을 그 문하로 추천을 안한대서야 사리가 맞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상연군의 도일은 당초부터 단독으로 한것이고 또 본인이 나에게 「기따니」 문하생이 될것을 부탁한 바도 없어 보고만있었던 것인데, 상연군의 일본에서의 행각이 「기따니」 선생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그래서 이와같은 꾸지람편지가 날아왔던 것이다. 나는 할수없이 상연군의 주소를 수소문하여 「기따니」9단을 예방하고 그 문하생이될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상연군 자신도 일본기계에서「기따니」9단의 존재가 얼마나 위대했던가를 체득한듯 얼마후에는 그 문하생이 되었다는 기별이 있어 나로서는 「기따니」선생의 뜻대로 응해드릴수 있었던 것으로 만족했었다. 그후 일본기원 2단을 인정받아 전문기사의 대열에끼게 되었는데 선생댁에 기숙은 하지않고 따로 나가 있었으므로 공부에는 큰 도움을 못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생인 치훈군을 일본으로 데리고 가는데 성공했다. 「기따니」9단을 설득시켜 6세되는 동생을 그 문하생으로 만들었다.
즉 62년8월2일「기따니문하 백단돌파기념대회」가 열렸는네 그석상에서 임해봉 (당시6단) 에게5점으로 치훈군이 대국하는「프로그램」이 짜여 있었던 것이다.
그때 치훈군은 1천2백명이 관전하는 가운데 당당히 불계승하여 그의 앞날을 축복받는듯 했다. 그러니 치훈군은 도일유학생 제3호가 되는 셈이다. 도일전 치훈군의 기력은 나와의 환송3번기에서 5점으로 3연패를 한 정도여서 임6단에게도 질줄 알았었는데, 나와의 3번기에서 얻은바가 있었던 모양인지 쾌승해 주었을때는 정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부터 치훈군은 「기따니」 도장으로 직행하여 말도 통하지 않은 답답한 형편이었지만, 부인과 따님(목곡례자6단)의 정성어린뒷바라지의 덕택으로 오늘과 같이 대성하게 된 것이다.
이 다음으로 유학한 제4호는 63년10월26일 도일하여 만9년만에 일본기원5단으로 귀국한 조훈현7단, 제5호는 63년12월30일에 갔다가 만7년만에 5단이되어 귀국한 하찬석6단이오, 제6호는 68년3월13일에 갔다가 만2년만에 3단으로 귀국한 윤기현7단이다.
체류기간이 가강 짧은것은 1년9개월의 김인8단이며 가강 긴것은 조훈현7단의 만9년이다.
거의가 「기따니」9단의 문하생이지만, 조7단은 「세고에」 (뇌월혜작)9단의 문하생이오, 또 윤7단은 「가노오」 (가납가덕) 9단의 문하생이었다. 그러나 윤7단은 「기따니」 도장에서 많이 공부했으므로 실질적으로는「기따니」도장출신이라해도 다를바가없다.
일본기원의 유학이 얼마만큼 효과가 있는지 한두마디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모기사의 말에 의하면 『윤군 (당시 6단) 이 도일할때는 중앙의 세력작전이 단골이었지만 그 당시는 호박에 침놓는 격으로 찌르면 부너졌었는데 유학에서 귀국한 후에는 찔러봐도 잘 들어가지않게 되었다』고 했다. 이는 윤7단의 기력향상에 대한 괄목진전을 말해주는 단적인 표현이었다.
현재 우리 기계는 이 일본유학을 거친 기사에 의해 「타이틀」이 거의 독점되고 있는 실정인데, 그 실례로 조7단이 6개의 「타이틀」을 휩쓸다시피하고 김8단이 2개를 차지하고있으며, 국내수학의 기사로는 서봉수5단이 유일하게 「명인」 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본유학을거친 기사들은 그외의 중요한「리그」전에 많이 들어있다는 것으로불 때, 그보람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조치훈7단이「구또」(공등기부· 37세) 9단에게 왕좌 「타이틀」을 빼앗겨 섭섭했지만 그보다도 「기성」전,「명인」전에 우승하여 국위를 선양해 주기를 바라는것은 필자만의 염원은 아닐 것이다. 곁들여 조훈현7단도 재차 도일의 길을 터서 세계정복을이루어 주었으면 싶다. 기사로서의 보람은 최고의 「타이틀」을 차지합에 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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