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경제 "전쟁보다 무서운 괴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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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급성 폐렴과 비슷한 '괴질'이 전세계로 퍼지면서 아시아 경제엔 이라크 전쟁보다 괴질의 타격이 더 클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주요 국제금융기관이 괴질로 인한 심각한 경제피해를 이유로 아시아 국가들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을 줄줄이 깎아내리고 있다.

특히 아시아 지역은 관광 산업과 관련된 항공.호텔.서비스 업종은 물론 무역.부동산.내구재 분야에서도 소비가 급감하는 추세를 보여 업체마다 대책을 마련하느라 고심 중이다.

경제성장률 전망치 하향 조정=괴질 감염환자가 속출하고 있는 홍콩.싱가포르.대만에선 휴교.휴가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일반인들의 외출 자제로 소비심리가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투자은행인 BNP파리바 페레그린은 최근 보고서에서 "아시아 경제의 양대 축인 관광과 개인소비가 위축됨에 따라 경제성장률이 둔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회사는 홍콩.싱가포르.대만.태국 등 동남아 각국의 성장률 전망을 당초 예상보다 0.5~1.5%포인트 낮췄다.

특히 괴질 확산의 진원지인 홍콩의 경우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1.5%에서 0.9%로 낮췄다. 이는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조정 폭(0.2~0.4%포인트)보다 훨씬 큰 것이다.

모건 스탠리와 골드먼 삭스 등 다른 금융기관들도 괴질 확산에 따라 아시아 각국의 성장률을 하향 조정하고 있다. 골드먼 삭스에 근무하는 김선배 이코노미스트는 "홍콩의 성장률은 당초 예상한 3%대에서 2%대로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서비스업종이 가장 심각한 타격=관광.사업 목적의 여행객이 급감하면서 예약 취소 사태가 잇따르고 있다.

그 바람에 항공업체들은 아시아지역의 운항노선을 감축하는 비상대책을 마련했다. 홍콩의 캐세이 패시픽 항공사는 이달 중 도쿄.방콕 등 아시아 8개 도시를 운항하는 4백92편의 운항 계획을 일시적으로 축소할 계획이다.

드래곤 항공 역시 중국.대만을 오가는 항공편을 주 10편씩 줄였다. 일본항공(JAL)은 "괴질 확산과 이라크 전쟁으로 지난달에 예약을 취소한 국제선 여행객이 1만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런 현상은 호텔.음식점.쇼핑가 등으로 파급되고 있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하버 플라자 호텔의 마케팅 매니저는 "4월 중 예약취소가 잇따라 5백66개의 객실 예약률이 50%선에 불과하다"며 "다른 호텔들이 30%대까지 떨어진 것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의 호텔 관계자들은 "일본.홍콩 기업들이 현지출장 대신 전화와 인터넷으로 일을 처리해 예약 취소가 잇따르고 있다"고 전했다.

홍콩의 음식점들은 지난 주말부터 매출이 평소의 30~40%선까지 곤두박질쳤다. 백화점과 명품점의 쇼핑객은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졌으며, 괴질 감염지역에 있는 일반 가게들은 절반 가량이 휴.폐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영화관.공연장.가라오케 등엔 찬바람이 불고 있다.

태국의 수찻 차오위싯 재무장관은 "괴질의 영향이 이라크 전쟁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밝혔다. 태국의 올해 관광객 수는 당초 예상했던 1천1백70만명에서 1천1백만명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홍콩=이양수 특파원

<사진설명>
홍콩 증권거래소의 중개인들이 지난 1일 괴질 감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쓴 채 근무하고 있다. 홍콩 증시는 이날 이라크전과 괴질로 인한 경기 악화 우려로 4년6개월만에 최저치까지 하락했다.[홍콩 로이터=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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