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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타락, 여론조사 경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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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

요즘 정치권 곳곳에서 희대의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여론조사 경선이다. 여론조사라는 건 샘플을 추출해 전체 집단의 모습을 파악하는 통계적 기법이다. 이 때문에 불가피하게 표본오차가 발생한다. 사회과학 교과서엔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 이내의 수치들을 비교해 우열을 가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지난 10일 새누리당 경기도당이 발표한 11개 기초단체장 경선(100%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자. 오산 경선에선 1위 후보가 40.90%를 얻어 2위 후보(40.65%)를 고작 0.25%포인트 차이로 제쳤다. 하남에선 1위(50.4%)와 2위(49.6%)의 격차가 0.8%포인트였고, 의정부는 1.4%포인트, 김포는 1.5%포인트, 여주는 1.55%포인트, 가평은 1.6%포인트 차이였다. 11곳 중 6곳이 오차범위(대개 ±3%포인트가량) 내 격차다. 이론상 이런 상황이면 1위가 2위보다 반드시 우세하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작금의 여론조사 경선은 0.01%라도 더 나온 후보의 승리를 인정하는 구조다. 정치권이 민주주의의 원칙보단 경선의 편의성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서 벌어지는 부조리다. 이런 건 상향식 민주주의라기보단 민주주의의 타락에 가깝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비슷한 일이 많이 생길 것이란 점은 불문가지다.

 2000년 총선 때 경기도 광주에서 한나라당 박혁규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문학진 후보를 불과 2표 차로 이긴 전설적인 일화가 있다. 그래도 아무도 박 후보의 당선을 문제 삼지 않았다. 유권자들의 표심이 아주 미세하게나마 박 후보 쪽으로 기울었다는 게 객관적으로 확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새누리당의 경기 지역 여론조사 경선에서 과연 표심이 1위 후보에 있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과학적인 답변은 ‘그렇지 않다’다. 진 쪽에서 패배 승복이 힘든 이유다. 물론 애초에 후보들이 0.01%라도 더 나오는 쪽이 이긴다는 룰에 합의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론 문제가 없다고 해명할 순 있다. 그럼에도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 정치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요즘 불법 착신전환이니, 여론조사기관 매수설이니 해서 여론조사 경선을 둘러싼 잡음이 증폭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건 부차적 사안일지 모른다. 현장투표 경선을 해도 버스 동원, 금품 살포 같은 부작용은 벌어지기 마련이다. 여론조사 경선의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우열을 매기기 힘든 오차범위 이내의 격차를 억지로 판가름해서 순위를 매긴다는 데 있다. 이건 아무리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기술적으로 완벽한 여론조사 경선을 했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원초적 한계다. 그래서 “경선을 여론조사로 한다는 건 미친 짓”이라고 말하는 여론조사 전문가도 있다.

 정치권이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당장 여론조사 경선을 폐지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오차범위 내 격차에 대해선 추가적인 경선 절차나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대로 그냥 뒀다간 여론조사 경선 때문에 언젠가 대형 사고가 터질 게 뻔하다.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