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근영, 식물처럼 자라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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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고정되고, 시력이 고정되면, 더 이상 나쁠 것도, 더 이상 좋을 것도 없다. 문근영은 아직도 키가 자라고 있고, 무한한 상상력과 함께 꿈도 자라고 있다. 어느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변하는 액체처럼 맑고, 투명한 열일곱 살의 배우, 문근영의 자화상.

근영과 수연의 기이한 동거

<가을 동화>의 은서, <명성황후>의 민비 아역을 어른들 못지않게 훌륭하게 소화한 이 작은 아이에게 영화 <장화, 홍련>은 누구의 딸, 누구의 어린 시절이 아닌, 독립된 생명체로의 존재감을 심어준 첫 작품이다.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을 잊을 수 없어요. 뭐랄까, 다 읽고 났을 때 내 안에서 무언가 끈끈하고 따뜻한 액체가 차오르는 느낌. 내 몸 전체가 그 액체에 젖어서 가슴속까지 무거워지는 느낌이었죠.”

그녀는, 자신이 수연이와는 다른 아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수다 떨며 떡볶이 먹는 걸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아서, 죽을 것처럼 두려워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야마는 아이. “난 내가 밝기만 한 아인 줄 알았는데 영화를 찍으면서 점점 수연이를 닮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짓궂은 소년 같지만 심각해지면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낙천적이다가도 어느새 우울해하고. 그래서 그해엔 유독 가을을 많이 탔어요. <장화, 홍련>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서 책이나 비디오를 보더라도 그와 비슷한 느낌의 것들을 많이 찾아봤죠. 영화 <초콜릿>의 초콜릿 가게의 느낌도 왠지 <장화, 홍련>과 비슷해요. <초콜릿>의 끈적끈적한 느낌, 그리고 고독한 색깔도 <장화, 홍련>과 닮아 있죠.”

유년의 기억

근영이는 항상 외할머니와 함께 다닌다. 광주에 계신 부모님을 대신해 근영이를 돌봐주시는 할머니. 감시(?)와 때론 지나친 간섭(?)이 느껴지기도 하는 여느, 연예인들의 매니저 역할을 하는 가족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따뜻하고, 살갑다. 할머니를 챙기는 예의바른 손녀인 그녀를 보면,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닌, 가족의 보살핌 속에서 잘 자란 작고 귀여운 식물을 보는 듯 하다. 스태프들에게 차를 따라주며 그녀가 말한다. “부모님은 제가 하고 싶은 걸 하길 바라셨어요. 어릴 적엔 너무 되고 싶은 게 많았어요. 간호사, 선생님, 발레리나, 헤어 디자이너, 심지어 슈퍼마켓 아줌마까지. 그러다 이 모든 걸 할 수 있는 게 바로 탤런트란 생각이 들었죠.” 고등학교 1학년의 탤런트. 평범하면서도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 애매한 포지션 속에서도 근영이는 이 상황을 오히려 즐긴다. “아직 너무 어린 탓에 못 맡는 배역이 많아서 아쉽지 않냐구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도 있었죠. 하지만, 지금 이렇게 행복한데, 천천히 현재를 즐기면서, 음미하면서 이십대를 맞이할래요.” 그리고 덧붙인다. 스무 살이 넘으면 좋은 게 또 하나 있을 것 같다고. 미성년자 관람 불가라서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을 볼 수 있다는 것.

어린신부

2004년 봄엔 문근영이 타이틀 롤을 맡은 작품이 개봉할 예정이다. 이번엔 ‘어린 신부’다. 어릴 적 부모님의 약속 때문에 고등학생 신분으로 결혼을 하는 엽기 발랄한 보은. “수연이가 계속 가슴에 남아 있어서 5회 분을 찍을 때까진 이질감이 들었어요. 하지만 나의 일상을 관찰하던 스태프들이 이렇게 말하던데요. ‘근영아, 너의 평소 모습대로만 해. 어린 신부는 딱 너야.’” 덕분에 낯가림을 하는 시간의 간격도 점점 짧아지고 있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던 밝은 성격을 되찾았다. “송강호 선생님처럼 무던하게.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배우의 얼굴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 같아요. 그래서 좋은 배우가 되려면 우선 착해져야 할 거 같아요.” 열일곱 살의 착한 소녀가 벌써부터 안성기나 로베르토 베니니처럼 행복한 주름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근영에게는 그저 사랑스럽다고만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소녀 같으면서도 어른스럽고, 감정이 넘치면서도 담담하다. 그런 기이함은 열일곱의 소녀가 설명할 순 없는 복합적인 배우의 아우라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맑은 꿈, 착한 생각, 엉뚱한 상상은 문근영이란 배우에게 101가지의 얼굴을 만들어줄 것이다.

기획 : 목나정(코스모걸) | patzzi 윤소영
기사제공 : 팟찌닷컴 (http://www.patz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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