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하노이 타워'를 아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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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0면

이런 곳이 있었구나!

생전 처음 보는 모양의 목조 건물들, 속이 빈 나무 공(한국 사람들은 목탁이라고 불렀다)을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한쪽으로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끝없이 이어진 산봉우리들. 1천년도 더 된 목조 건물이 있다는 부석사가 여기였다.

잘 나가는 미국 과학자인 내가 한국에 오고 1년반. 그간은 도시에서만 살았다.가끔 가족이 놀러가는 곳이라야 놀이공원 정도였다.

박사 후 연구원으로 일하던 2000년대 중반, 내게 한국은 그저 유별나게 똑똑한 과학자들이 많은 나라였다.

그러다 2007년 사건이 터졌다. 한국에서 핵융합로가 완성돼 무려 5분간 전기를 지속적으로 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핵융합로라면 엄청난 비용과 인력.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인데 조그만 나라 한국이 그 일을 하다니!

그 뒤에도 한국 과학자들이 물질의 모든 원리를 설명하는 '대통일 이론'을 완성했다는 등등의 소식이 이어졌다.

2010년 말. 드디어 한국인 첫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왔다. 한때 나와도 함께 연구했던 사람이었다. 이내 그로부터 '한국에서 공동 연구를 하자'는 제의가 왔다. 당장 가족과 함께 보따리를 쌌다.

급여는 미국에서보다 좀 못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과 함께 연구를 하는 데야 불만이 있을 리 없다.

옆에서 조용한 대화가 들려왔다. 노승과 동자승이 편평한 돌들을 이리저리 쌓아가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건 '하노이 타워'가 아닌가! 대학원 시절 컴퓨터 프로그래밍 연습을 하며 하노이 타워 문제를 풀던 생각이 났다.

큰것부터 차례로 쌓아 올린 돌들을, 특수한 규칙을 지켜가며 하나씩 옮겨 다른 곳에 원래와 똑같은 모양으로 쌓아 올리는 것이었다.

규칙을 그대로 따르면 돌이 여섯개만 돼도 최소 63번은 옮겨야 한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저사람들이 뭔지 알고 하는 것일까. 벌써 한국어를 술술하는 여덟살 아들놈의 입을 빌려 노승과 대화를 나눴다.

"무얼하십니까."

"'영겁'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아들놈도 '영겁'의 뜻을 몰라 재차 물었더니 아주 긴 세월이란다. 앗, 그렇다면 하노이 타워에 깔린 수학을 안다는 얘긴데….

노승의 말이 이어졌다.

"불교에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전설입니다만, 세상 어딘가 64개의 돌로 된 탑,'하노이 타워'가 있답니다. 승려들이 그걸 규칙에 따라 하루에 한번씩 이리저리 옮기며 탑을 다시 쌓는데, 완성하면 거듭되는 환생의 끝이 온다고 하지요. 이를 마치려면 2의 64제곱 정도의 날짜, 즉 1조년의 5만배쯤 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까지 아십니까."

"요즘 보살님들,과학을 섞어 얘기해야 눈을 반짝거리셔서요."

나를 닮아서인지 과학을 좋아하는 아들놈에게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래, 한국에서 키우자. 이런 나라에서 자라면 틀림없이 아비를 능가하는 과학자가 되리라.허락해주면 연구 계약 기간 3년 동안만이 아니라 아예 평생 한국에 눌러 앉아야겠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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