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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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나는 담이로소이다. 수삼 세기에 걸친 자랑스런 나의 가계 중에는 한 키도 훨씬 넘는 우람스런 궁궐의 돌담이 된 조상도 있고, 몰골도 앙상한 두메산골의 흙담으로 영락한 조상도 있었다오.
하나, 대부분의 조상은 생나무 울타리였다오. 동국세시기에도 적혀 있기를…
『솔가지 꺾어다가 울타리 새로 하고…
장원도 수축하고…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다닷고나…
울밑에 호박이요 처마가에 박심고
담 근처에 동아 심어 가자 하여 올려 보세.』
뭐 풍류랄 것까지는 못 될지 모르지만 제법 운치가 있었다고는 할 수 있지 않겠소.
내 조상들은 한때도 뭔가를 감추고, 숨기고, 지키자고 있던 것은 아니라오. 그러기에 담이라기보다는 울타리들이었고, 울타리를 넘자면 어린이도 쉽사리 넘을 수 있을 만큼 키가 작은 분들이었소이다.
사릿대문 사이로, 또는 솔가지 울타리 너머로, 이웃집 처녀와 총각이 눈 신호를 보내고, 얼굴을 붉히는 정경…. 이 또한 멋들어진 것이 아니었겠소.
이런 멋을 요새 사람들은 모르는 모양이라니 적이 딱하다 할까, 한심스럽다 할까.
무슨 숨길 비밀이 그리도 많고, 무슨 감춰야 할 재산이 그리도 많은지, 한 키가 넘는 「볼록」담 위에 유리 조각을 꽂고, 그것도 또 모자라서 철조망을 휘감고….
이러는 북새통에 내 꼴이 흉해지는 거야 참을 수도 있겠지만, 그 서슬이 퍼런 철조망 담을 사이에 두고 가뜩이나 살발한 도시 인심이 더욱 사나와지니 그게 안타까울 뿐이요.
예전이라면 아낙들이 넋두리를 나누고, 고사떡을 넘겨주던 담.
지금은 나와 남을 갈라놓고 집밖은 모두가 도둑이자 원수라고 아이들에게 일러주는 것이 되었소이다 그려. 그러나 내 꼴이 뭣이란 말이요. 도독을 막자니 하는 수 없다고들 사람들은 곧잘 말합니다. 하나 담이 낮은 옛날이라고 도둑이 유별나게 많았으며 철조망을 둘렀다고 도둑이 없답디까.
가시철망이 꼭 있어야겠다면 예처럼 탱자나무도 있겠고, 또 덩굴장미도 있겠거늘, 요새 사람들은 너무 멋을 모르고 사는가 보오.
담은 서로가 함부로는 넘나들지 않겠다는 약속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거요. 사유지의 경계 표시만이 아니고.
그렇다면 사철나무·유자나무·후박나무·향나무·개나리… 얼마든지 생울타리로 담을 대신할 수 있을 거요. 그저 생활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겠다는 정성과 미의식이 문제될 뿐이라오.
요새 대구나 전남의 시골에서 멋없던 돌담들이 생나무 울타리로 바뀌어져 가며 있다고 하오. 듣기만 해도 흐뭇한 담장 혁명이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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