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플러대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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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로마」의 죽음』이란 영화가 있었다. 「로마」주재 「나치」보안사령관 「헤르베르트·카플러」대령을 주인공으로 한 실화소설로 미국작가 「로버트·카트」의 작품. 그 「카플러」역에 「리처드·버튼」이 등장했었다.
1944년3월, 무대는 「로마」의 어느「바」. 한 무리의 청년들이 이 주점에 나타나 느닷없이 기관소총을 난사했다. 「이탈리아」의 「게릴라」들이다. 이들의 총질로 그 「바」에 있던 독일군인 32명이 몰살을 당했다.
이런 보고를 받은 「카플러」대령은 살기가 등등했다. 독일점령군들은 「유대인」을 포함한 3백50명의 「로마」시민을 「아르데아틴」동굴로 몰고 갔다. 그리고는 이 동굴에 수류탄을 던지고 화염방사기로 불길을 뿜어댔다.
「아르데아틴」동굴은 전후30년이 지난 오늘에도 「로마」시민들에겐 악몽과 전율의 상징이 되고 있다. 「카플러」대령은 종전과 함께 「로마」의 전범재판에서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전후의 한 세대가 지나가도록 그는 감형의 혜택조차 받지 못하고, 「나폴리」의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지난해 2월부터는 그의 병세가 위암으로 밝혀져 「로마」의 「첼리오」육군병원에서 감금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바로 그 「카플러」대령이 최근 병원을 탈출, 서독으로 사라져 버렸다. 54세의 부인이 그를 대형「가방」 속에 숨겨 고국으로 탈출시킨 것이다.
국외자의 호기심으로 보면 이들 옥중결혼을 한 노부부의 「휴먼·드라머」가 한결 돋보인다. 체중이 45kg밖에 되지 않는, 절망적인 병고 속에 있는 70세의 노부를 구출한 부인의 기지와 용기는 어떻게 평가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서독정부는 오히려 「카플러」대령에게 동정을 쏟고 있다. 이미 정부가 나서서 그의 석방을 「이탈리아」에 요구한 일도 있었다.
지금 그의 우연한 탈출은 서독정부로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정부는 「딜레머」에 빠지게 되었다. 다시 일깨워진 『「아르데아틴」동굴의 악몽』 속에서 국민감정이 온순할 리가 없다. 벌써 이 동굴을 찾아간 「로마」의 시민들은 「데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던 피서객들도 임시급보를 듣고 성급히 「로마」로 달려와 『「나치」놈을 잡아 오라』고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한때 「로마」교황청도 「비오」12세 교황이 「카플러」의 학살을 방관했다는 구설수를 만나 곤경에 빠진 일이 있었다.
서독정부는 그러나 「카플러」를 인도해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있다. 「슈미트」수상은 「이탈리아」의 「안드레오티」수상의 요구를 한 마디로 거절했다. 양국의 외교관계는 긴장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전후30년. 전화의 흔적은 사라졌어도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전쟁의 상처는 좀처럼 쉽게 아물지 않는다. 「로마」시민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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