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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관료 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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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경제에디터 겸 경제연구소장

17대 대선이 이명박 후보의 승리로 끝난 2007년 말. 관료들은 불안했다. 기업인 출신 대통령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물어보나마나 이 당선인이 평생 관료들에게 시달렸을 게 틀림없었다.

 우려는 이내 현실이 됐다. 이듬해 1월, 이 당선인은 관료를 몰아붙였다. “이렇게 막힌 곳이 많은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관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길목을 다 막아놨다.”

 내친김에 그는 대불공단 전봇대를 상징적인 규제로 거론하며 관료를 압박했다.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표방하고, 장관급 10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의 자리를 줄였다. 인사에서도 관료를 표나게 홀대했다. 관료들은 부글부글 끓었다. 당시 농림부 모 국장은 “우리 산하기관은 원래 농림부와 정치권이 나눠서 가는 건데, 요새는 정치권에서 다 간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관료는 정권이 만만하면 틈새를 파고들어 자리와 이권을 챙기는 속성이 있다. 반대로 정권이 강하면 납작 엎드려 훗날을 기약한다. 정권은 5년이고, 관료는 정년까지이니 급할 게 없다. 당시는 누가 봐도 납작 엎드릴 차례였다. 그들은 이명박 정부에 등을 돌리고, 복지부동에 들어갔다.

 그해 봄 광우병 사태가 터졌다. 관료들은 꿈쩍 안 했다. 대통령에게 ‘우리 없이 고생 좀 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광우병 사태가 엄청난 상처를 남기고 수습되자 여기저기서 관료를 두둔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대통령이 관료를 믿어야지, 손볼 대상으로 여기니 국정이 마비된 게 아니냐” “따지고 보면 관료만큼 일 잘하는 집단도 없다” “아무개 관료가 있었으면 이 지경까지 되지 않았다”….

 광우병 사태로 이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했지만, 사실은 꿈쩍 않는 관료에 항복한 셈이 됐다. 집권 반 년 만에 예전의 관료왕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이전 대통령들도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까지 해체한 김영삼 대통령이었지만, 관료는 별로 손대지 못했다. 임기 중에 정부조직을 개편하는 극약 처방을 내놓기도 했다. 효과는 없었다.

 외환위기 중에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처음부터 디테일에 강한 관료에 의존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태생적으로 관료를 싫어했다. 하지만 ‘큰 정부’를 지향하는 바람에 관료의 운신 폭을 넓혀주고 말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처음부터 관료를 중용했다. 아버지 시절, 묵묵히 일하던 관료에 대한 좋은 인상이 남아 있어서일까. 박 대통령은 관료보다는 기업에 화살을 겨눴다. 관료 출신들의 머리에서 나온 경제민주화 공약을 갖고서. 또 다른 공약, 지하경제 양성화는 명분은 그럴듯했지만, 중소·중견기업들은 지난해 내내 세무조사에 시달려야 했다.

 집권 1년이 넘은 올 3월 비로소 박 대통령은 규제개혁 카드로 관료를 정조준했다. 지난해 원전 마피아와 공기업을 질책했지만, 관료 전체를 타깃으로 삼은 것은 처음이었다. 놀란 관료들이 숨죽이고 사태를 주시하던 차에 세월호 참사가 터진 것이다.

 박 대통령으로선 듣도 보도 못한 해피아(해양수산부+마피아)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라는 데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관료들은 관료들대로 밑천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당황하고 있다.

 다급해진 정부는 ‘국가 개조’라는 비전을 들고 나왔다. 상황은 녹록지 않다. 관료들은 정권의 임기가 5년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이미 1년 넘게 흐른 뒤다. 정권은 후반부로 갈수록 관료에 의존하게 된다 . 여기에다 어느덧 100만 관료 시대다. 관료 휘하의 공기업·산하기관·이익단체를 합치면 그 숫자와 세력을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박근혜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66년 이어진 관료왕국을 단숨에 개조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거창한 구호보다는 손에 잡히는 딱 하나라도 제대로 바꿨으면 한다. 이왕 시작한 규제개혁을 매듭지어 관료의 손발을 묶든지, 온 국민을 분노케 하는 낙하산 인사를 근절하든지.

 아니면 국민 세금으로 적자를 메워주는 공무원연금을 손보든지, 끼리끼리 문화의 온상인 행정고시를 폐지하든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면피성 뒷북 감사에 능한 감사원이라도 혼내주든지. 그나마 하나라도 바꾸려면 서둘러야 한다. 시간은 관료 편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고현곤 경제에디터 겸 경제연구소장